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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 리뷰- 이들의 기억이 곧 미국의 역사다
송경원 2021-03-03

미나리. 냇가와 습지에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 주로 아시아 지역에 분포하는 이 식물은 물기가 많은 토양이라면 어디에서든 키우기 쉽고 수질을 정화해줄 뿐 아니라 특유의 향미가 있어 잎과 줄기를 식용으로 쓴다. 청량하면서도 맑은 미나리의 향기. 때로 공간은 향으로 기억되고, 후각은 기억을 피워 올리는 강력한 촉매로 작동한다. 땅 냄새, 흙냄새, 바람 끝에 묻어나는 날씨의 냄새, 고추장과 된장에 인이 박인 그리움의 냄새까지. 새로운 삶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나온 이들은 지긋지긋했던 그곳의 모든 기억까지 내려놓고 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고 자란 고향의 냄새는 체취로 묻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 밑바닥에서 스며나오는 쪽에 가깝다. 어쩌면 한번도 미나리의 향을 맡아보지 못한 손자에게까지 이어질, 유전자에 새겨진 뿌리의 냄새.

할머니는 낯선 땅에 미나리를 심는다. 식구들 걷어 먹일 마음으로 가져와 심는 미나리는 아칸소에 뿌리를 막 내리려는 한국인 이민자 가족들을 닮았다.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딸을 만나러 미국까지 건너와 시골 마을의 개울가에 미나리 씨앗을 뿌리는 건 영화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장면이야말로 <미나리>의 진짜 시작을 알리는 두 번째 오프닝이라 할 만하다.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온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사연을 전한다. 젊은 시절 제이콥(스티브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자는 약속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영화가 섣불리 보여주지 못할 모진 풍파 속에서 두 사람은 딸과 아들을 낳고 낯선 땅에서 희망을 좇아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연고 하나 없는 이국에서의 생활이 순탄했을 리 만무하고 결국엔 변두리로 밀리고 밀려 아칸소의 어느 시골 마을까지 흘러들어왔다. 영화 <미나리>는 거기서부터 비로소 이야기의 막을 연다.

이민, 가족, 할머니

초록의 녹음으로 덮인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인적 하나 없는 도로를 가로지르는 차 안에서 남편 제이콥은 들뜬 듯 즐거운 기색이지만 아내 모니카의 얼굴엔 햇살마저 귀찮은 듯 점점 수심이 드리운다. 이윽고 도착한 너른 풀밭 위에 덩그러니 바퀴 달린 집이 서 있다. “이곳이 지금부터 우리가 살 집이야.” “우리가 약속했던 건 이런 게 아니잖아.”남편은 아무것도 없는 풀밭에서 농장을 지을 거라며 이곳이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고, 아내는 이곳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답한다. 폭풍우 치던 밤. 행여 집이 날아갈까 불안에 떨던 밤. 맏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동생이자 막내아들 데이비드(앨런 킴)에겐 부모의 다툼이 천둥소리보다 더 무서웠던 밤. 남편 제이콥은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아칸소 시골에서 사는 대신 한국에 남아 있는 장모님을 모셔오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미국에서 외로이 뿌리 내릴 땅을 찾던 한 가족에게 할머니가 찾아온다.

<미나리>는 가족 내의 몇몇 관계들에 무게 추를 옮겨가며 진행되는 영화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따라가던 영화는 모니카의 엄마이자 아이들의 외할머니인 순자가 가족에 합류하며 슬며시 손자와 할머니의 관계로 관심을 옮겨간다. 순자가 함께 살게 된 이후 제이콥과 모니카는 둘 다 돈을 벌기 위해 병아리 감별 일을 시작하고 할머니가 집을 보살핀다. 하지만 손자 데이비드는 말도 통하지 않고 낯선 냄새가 나는 할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쿠키를 구울 줄 아는, 친구 집에서 봤을 여느 미국 할머니를 바라지만 한국에서 온 할머니는 자신에게 쓴 한약을 먹기만을 강요한다. 카메라는 데이비드와 순자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식구가 되어가는 시간을 담아나간다. 뒤편 개울에 가서 미나리 씨앗을 함께 뿌리고 몰래 할머니에게 오줌을 먹이는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이들은 점차 가족이 되어간다. 처음부터 가족으로 태어났지만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맨땅을 새로 일구며 가족으로 다시 거듭난다고 해도 좋겠다.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의 갈등, 할머니와 손자, 손녀의 소소한 시간들로 채워진 이 영화는 미국 이민자 가정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음직한 어려움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은 본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짠 줄기에 주변인들의 세세한 디테일을 더해 생생한 잎사귀를 피워냈다. 사실 <미나리>는 말해주는 것보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다. 이들 부부가 미국에서 와서 어떤 어려움을 겪어왔는지, 어떤 사연으로 아칸소까지 흘러들어왔는지, 무엇 때문에 저토록 자신의 농장을 일구는 데 집착하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제이콥이 “아이들도 자기 아버지가 한번은 꿈을 이루는 걸 봐야 하지 않겠냐”고 절규하며 끝내 도시로 가는 걸 거부할 때 그간 지역사회로부터 받았을 고통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결국 이것은 희망을 찾아 헤매던 이들이 점점 변두리로 밀려나면서도 결코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는 이야기다.

미국 땅에서 자란 한국의 미나리

선댄스영화제에 참석한 <미나리>팀.

중요한 건 이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가 아니다. 카메라가 진정 전달하고자 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가족의 초상이다. 한국에서 건너온 엄마가 딸의 굽은 등을 쓰다듬을 때 우리는 거기서 온기와 세월을 마주한다. 풀벌레 소리 가득한 밤, 자신을 밀어내는 손자가 그래도 못내 귀여워 꼭 껴안아주던 할머니의 심장소리에서 우리는 위안을 선물받는다. 모든 것을 잃었던 밤, 허름한 마루에서 온 가족이 서로 고난한 몸을 부비며 함께 자는 장면 하나면 충분하다. 심장이 좋지 않은 데이비드의 심장 고동 소리로 출발한 영화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었던 어느 밤, 이야기를 닫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할머니 냄새 나”라던 손자가 언젠가 할머니의 냄새를 그리워하리라는 사실을.

알다시피 이것은 픽션이되 사실이기도 하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에서 이민자들의 삶이 지속되는 한, 미국 어딘가에서 또 다른 가족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기억이 곧 이민자의 삶이며 미국 역사의 일부다. 그리하여 따뜻한 시선과 담백한 유머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이민자들이 공감할 언젠가의 과거를 추억하는 영화이자 오늘날 이민자들의 삶과 공명하는 보편타당한 체험으로 거듭난다. 적은 예산으로, 매우 한정된 공간에서, 소수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임에도 시대와 장소, 커뮤니티를 넘어선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진실된 한국인의 모습을 전하려 <미나리> 제작에 참여했다.” <미나리>의 공동 제작자이기도 한 배우 스티브 연의 한마디는 이 영화의 정확한 좌표를 알려준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이 통속적인 장르를 경유해 할리우드 한복판에서 아시아 문화,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면 이제 변화의 흐름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중이다. <기생충>이 외국영화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저변을 넓힌 데 일조한 것도 흐름의 일부일 것이다. <미나리>는 할리우드가 이민자들의 진짜 삶과 진정한 얼굴, 그들이 겪어온 고난과 고유한 정서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결과물이다.

어쩌면 한국 관객 중 일부는 <미나리>를 한국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미국 관객 중 일부는 이걸 미국영화라고 생각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쯤 되면 영화의 국적을 따지는 건 부질없어 보인다. 미국 땅에 심은 미나리는 한국 미나리인가 미국 미나리인가.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집단이 나뉘고 구분되고 배척되기 마련이다. 우리에겐 차라리 ‘미국 땅에서 자란 한국의 미나리’라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에 미국에서 이민 온 한국인 가족은 있어도 이방인은 없다. 터 좋은 곳에 심으면 알아서 잘 자라고 어떤 요리에 넣어도 어울리며 건강에도 좋은 미나리는 진정 이 영화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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