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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기자의 리뷰 - 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영화 '자산어보'가 정약전과 창대를 그린 방식
이주현 2021-04-07

개인의 탄생

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영화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과 흑산도의 어부 창대(변요한)가 서로의 지식과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다. 이 우정의 서사에 성리학, 서학, 실학의 가치가 섞이고 흑백영화의 멋이 더해진다. 영화의 여백을 음미하며 쓴 <자산어보> 리뷰와 영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이준익 감독과의 인터뷰를 전한다.

영화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돛배에 외로이 앉아 있는 정약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유배지 흑산도에 가는 길. 고독하고 불안한 표류의 심상 너머 정약전이 마주하는 것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길을 찾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 중에는 창대라는 청년이 있다. 흑산도에서 나고 자라 바다 생물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어부 창대는 사실 물고기보다 글공부에 더 관심이 많다. 실제 정약전이 1814년 흑산도에서 쓴 어류학서 <자산어보>에는 창대라는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된다. 서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섬 안에 창대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않은 탓에 식견을 넓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차분하고 정밀하여 초목과 조어를 세밀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랜 시간 그의 도움을 받아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름지어 <자산어보>라고 한다.”

<자산어보>의 서문에 등장하는 창대라는 이름에서 영화 <자산어보>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일기>에 짧게 언급되는 광대 공길의 이야기에서 영화 <왕의 남자>가 탄생한 것처럼, 이준익 감독은 이번에도 실재했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역사 속 그림자 같은 존재에게서 보석 같은 이야기를 길어올린다.

이준익 감독이 흑백으로 선보이는 시대극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창대를 만나 책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표면적으로는 정약전과 창대가 신분과 나이와 사상을 초월해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목민심서>의 길과 <자산어보>의 길로 뻗어나가 근대적 사상의 발현과 그 실천까지 이야기한다.

어려서부터 함께 수학했던 우애 좋은 형제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 길마저 함께 떠난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형제는 배움에 거침이 없어 서학(천주학)에도 깊이 빠졌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1801년 신유박해(정조 승하 1년 뒤 발생한 천주교도 박해사건) 때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더 먼 흑산도로 유배된다. 나주 율정점에서 형제는 이별한다. 이때의 이별이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다. 정약전이 세상을 뜰 때까지 형제는 서신으로만 연락을 취했고, 정약용은 형 정약전에게 사무치는 그리움과 염려의 마음을 담은 여러 편의 시와 편지를 남겼다.

유배지에서 정약전과 정약용은 다른 길을 걷는다.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고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기록한 명저 <목민심서>와 수백권의 책을 썼다. 반면 형 정약전은 해양생물학 서적인 <자산어보>, 나라의 잘못된 소나무 관리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 어부 문순득의 바다 표류기를 기록한 <표해시말> 정도를 남겼다. 실용서거나 민중의 삶과 관련한 책들이다. 영화에도 이 저술의 배경이 된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러면서 정약전이 ‘<자산어보>의 길’을 가기로 한 마음을 들려준다. “이제부터 애매하고 끝 모를 사람 공부 대신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 공부에 눈을 돌리기로 했네.”

정약전은 창대의 도움을 받아 물고기의 생김부터 쓰임까지 본인이 직접 관찰한 것을 글로 기록한다. 물고기의 이름도 정확하게 지어준다.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것이 고유한 존재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정약전은 사물의 이름뿐 아니라 창대의 이름도 자주 부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창대야~”, 궁금한 것이 생기면 “창대야~”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 공자 왈 맹자 왈이 아닌 ‘창대에 따르면’이라고 창대의 이름을 써 그의 존재를 밝힌다. 한낱 백성, 한낱 천민이 아니라 이름을 통해 고유한 개인을 드러내는 일, 그것이 곧 개인의 탄생이고 근대의 탄생이다. 영화 말미 흑백의 화면에 등장한 파랑새의 존재는 <자산어보>의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감독이 색을 입혀 강조한 파랑새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으로 이어진다.

정약용이 쓴 <선중씨묘지명>에는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내면서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 교만 같은 것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며 서로 싸우기까지 하면서 자기 집에만 있어주기를 원했다”는 대목이 있다. 흑산도의 주민들과 친구처럼 지낸 정약전의 모습과 그런 정약전을 섬 주민들이 매우 아꼈다는 내용이다.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없는 세상을 꿈꿨던 영화 속 정약전은 그래서 “동생보다 위험한 인물”이었다.

영화는 성리학의 길과 서학의 길, <목민심서>의 길과 <자산어보>의 길을 두루 보여주는데, 어느 하나의 길에 답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자산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 정약전과 정약용이 끝까지 생각을 공유했듯, (비록 창대에게 목침을 던지는 장면이 있긴 하나) 정약전과 창대도 서로를 끝까지 염려하며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감정적으로 뜨거워지는 <애절양>의 대목과 <자산어보> 집필 내용이 병치되는 후반부는 두 갈래의 길이 하나로 이어짐을 보여주는 클라이맥스다.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격언을 한번 더 되뇌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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