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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 - 아들을 북에 보낸 어머니의 비밀
남선우 사진 백종헌 2021-09-14

'수프와 이데올로기' 양영희 감독

조총련 활동가였던 아버지에게 <디어 평양>을, 북한에 사는 오빠와 조카에게 <굿바이, 평양>을 띄워 보냈던 양영희 감독이 비로소 어머니에게 한통의 편지를 부쳤다. 남편이 떠나고 치매를 앓게 된 어머니가 문득 제주 4·3의 기억을 반추하면서, 어머니의 지난날을 향한 안부 묻기가 시작되었다. 일본과 한국, 북한 사이에 놓인 인간 강정희의 더께를 걷어내며 대화를 시도한 딸 양영희 곁에는 그의 남편이자 이 집안의 새로운 가족이 된 아라이 가오루가 함께였다. 그들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뒤로한 채 가족의 이름으로 닭고기를 뜯던 시간이 영화에 기록되었다. 제13회 DMZ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양영희 감독을 만났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후반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지냈다고.

=영화에 들어가는 애니메이션 작업까지 하느라 2년을 한국에서 보냈다. 짧은 여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오래 있어본 적은 처음이다. 특히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1998)이 내가 연출한 방송 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1996)을 무단 도용한 문제로 아주 복잡한 시간을 보냈다. 부산국제영화제와의 문제 때문에 한국 영화제에 대한 신뢰도 많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한국의, 제주도의 역사이기에 꼭 한국에 선보이고 싶었다. 몇몇 사람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상담했는데, DMZ영화제의 성격과 잘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제가 영화 자체로 판단해주리라 믿고 출품했다. 이런 와중에 감독조합에 들어갔고, 조합원들로부터 격려도 많이 받았다. 일본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나도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하면 모른 척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병원 침대에 누워 제주 4·3을 떠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머니로부터 처음 4·3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기억나나.

=<디어 평양>을 찍을 때부터 어머니, 아버지에게 우리 가족의 역사에 대해 많이 물었다. 양쪽 조부모가 모두 제주 출신이고, 아버지 고향도 제주도니 어머니에게 4·3에 대해 물었었다. 어머니는 항상 구체적인 설명 대신 내 질문을 막으셨다. 그래서 막연히 우리 친척 중에는 희생자가 없겠거니 생각해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몸이 안 좋아지셨다. 그제야 어머니가 “앞으로도 영화를 만들 거면 내 영화도 만들어라”라고 하시면서 4·3의 현장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무 놀랐다. 그때부터 일본에서 많은 차별을 받고 제주도에 정착하려 했으나 4·3때문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아버지, 오빠들의 일화는 사진 자료로 보여준 것과 달리 어머니의 스토리는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냈다.

=유럽 감독이 유대인 학살에 대해 얘기할 때는 설명이 필요 없지만 재일 코리안 문제는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디어 평양> 때처럼 4분간 스크린에 글자만 띄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가족들은 사진을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지만 어머니에겐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사진이 없었다. 일본 이름으로 일본 학교에 다녀야 했던 게 싫으셨던 거다. 그래서 7분가량의 애니메이션용 대본을 썼고,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인 고시다 미카의 원화를 썼다. 어머니, 어머니의 남동생과 여동생은 클레이로 인형을 만들었다. 투박한 애니메이션이지만 관객의 인상에 남길 바란다.

-어머니의 역사를 재발견하는 여정과 감독의 일본인 남편 아라이 가오루가 새로운 가족이 되는 과정이 겹치며, 과거와 현재의 역사성이 교차된다.

=남편이 좀 특이하다. 만난 지 몇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 엄마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거다. 처음엔 안된다고 했는데 그림이 재밌겠더라. 남편이 원래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니 “당신이 우리 엄마를 만나러 갈 때 어깨만 찍겠다. 얼굴 안 보여줘도 된다”고 설득했는데, 자기 얼굴이 나와야 재밌지 않겠냐는 거다. 본인이 어떤 여자와 교제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거다. (웃음) 남편 덕에 어머니랑 있을 때 내가 어머니께 더 친절할 수 있었다. 남편이 어머니와 나 사이의 좋은 쿠션이자 다리가 되어줬다.

-영화의 제목에 들어간 ‘수프’는 한국의 백숙과 같더라. 어머니와 아라이가 각각 닭고기 수프를 끓이는 장면이 세번 정도 연달아 나온다.

=엄마와 국적도, 배경도 다른 남편과 일본인과 결혼은 절대 안된다고 말해왔던 어머니가 가까워지는 그림으로 그것만 한 장면이 없었다. 가족을 ‘식구’라고도 표현하지 않나. 공존의 방법은 같이 밥을 먹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없이 이야기할 때보다 커피가 있으면 다르고, 케이크가 있으면 더 다르고, 술이 있으면 또 다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도 같이 밥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

-어머니의 치매 증세가 심해질수록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잦아진다.

=영화 앞부분에 나오듯 부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우리 집에서는 흔한 장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참 신기한 부부다’ 생각하며 부모님을 바라봤다. 근데 아버지는 치매가 시작된 후로 북한 노래를 안 부르시더라. 반대로 어머니는 충성한다는 노래를 계속 부르셨다. 때로 소름이 돋을 때도 있었다. 영화를 완성하고서야 어머니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오사카에서도 제주도에서도 상처를 받았으니 한번도 가보지 않은 북한에 희망을 걸었던 거다. 어머니는 오빠들을 북한에 보낸 후 우울증을 겪고, 아버지 권유로 조총련 활동에 더 열중하셨다. 어머니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가 지나왔을 시간들이 계속 떠오른다.

-<디어 평양>으로 아버지를, <굿바이, 평양>으로 오빠들과 조카를 조명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비로소 어머니를 돌아본 소감은.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이렇게 오래 걸리는구나 싶다. 하나의 인생이 한편의 영화가 된다는 말을 하는데, 100편의 영화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 이야기를 서너편의 영화로 만들었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터부로 남아도 좋은 인생은 없다. 조총련, 북송 문제, 그리고 4·3에 대해 더 많은 영화가 나와야 한다. 세상에 망가지지 않은 가족은 없다. 망가졌기 때문에, 미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거다. 그걸 그려내는 게 문학이고 영화다. 그 사랑스러움을 공유하기 위해 앞으로도 영화를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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