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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해적,디스코왕 되다
2002-06-04

시사실/해적,디스코왕 되다

■ Story

달동네에 사는 소년 해적(이정진)은 길거리에서 찐빵을 먹고 있던 소녀 봉자(한채영)에게 첫눈에 반한다. 친구 봉팔(임창정)의 여동생이기도 한 그녀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술집에 나가기로 결심한 착한 아이. 해적은 봉팔과 성기(양동근)와 함께 그녀를 구하고자 황제 나이트로 쳐들어가지만 프로 건달들의 주먹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나이트 주인인 큰형님은 해적의 ‘살아 있는’ 눈빛을 높이 사 딱 한 가지 일만 해내면 봉자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일주일 뒤에 열리는 디스코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라는 것. 열여덟 평생 스텝 한번 밟아본 적 없는 해적은 일주일 동안 피나는 수련에 돌입한다.

■ Review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김동원 감독은 7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에게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다. 74년생인 그는 노인들이나 귀기울였을 약장수의 공연을 좋아했고,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만담 코미디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의 시대감각은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몸 안에 품고 있는 듯 매우 이상하다. 김동원 감독은 또 폼과 흥을 중시하는 낙천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폼나잖아”라는 말로 영화감독이 된 이유를 설명한 그는 “춤을 잘 춘다기보다, 흥을 따라서 멋있게 추는 타입”에 속한다고 자부한다. 그의 첫 번째 장편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이처럼 노숙한 것 같으면서도 귀여운 면이 있고, 태평하게 늘어져 보이면서도 흥에 겨운 인생을 추구하는 감독 자신과 무척 닮은 영화다. 가난하지만 모두가 착했던, 정체불명의 시대에서 날아온 이 영화는 젊은이의 시선으로 한번 걸러진 신기한 과거의 풍경을 보여준다.

원안에 해당할 김동원의 단편 와 달리, 이 영화는 시대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됐을 무렵을 배경으로 했던 단편 버전은 26분으로 압축된 소년들의 모험에 현실적인 발언도 약간 보탠 영화였다. 그 영화 속에서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팍팍하고 때도 묻어 있지만, 올림픽이 열리면 우리나라도 잘살게 되지 않을까, 언론이 선동하는 대로 순진하게 믿어버린다. 아이들은 일찍 영악해져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그리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흑백의 거친 화면이 녹여냈던 80년대 초반, 짙었던 그림자를 말끔히 걷어냈다.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착하기만 한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선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절박했던 가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큰형님은 해적의 기개와 애정을 진심으로 높이 사는 로맨티스트고, 주먹만 믿고 사는 해적은 엄마한테 제대로 대들지도 못할 정도로 바르게 자라난 소년이다. 해적의 양복에 달린 커다란 꽃송이처럼, 이 영화는 세상과 사람들의 예쁜 부분만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똥 나르는 지게와 병에 담긴 우유, 반짝이는 원색 의상, 촌스러운 포스터, 쭈그리고 앉는 변소, 연탄 아궁이.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한때 실재했던 소품들을 늘어놓으면서 80년대쯤으로 짐작하게 되는 상황을 연출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그런 동화 같은 삶이 있었을 리 없다. 감독의 말대로 이 영화는 ‘판타지’다. 김동원 감독은 <해적, 디스코왕 되다>가 80년대 복고붐에 편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이 영화가 밉지 않은 것은 그 판타지가 관객의 눈을 가려보겠다는 약은 계산 대신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러운 기질을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간소한 단편에 비한다면 대하소설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여러 인물을 배치한 이 영화는 그 풍성한 인물들에 기대면서 웃을 수밖에 없는 귀여운 삽화들을 연이어 들이민다. 해적이 심각한 얼굴로 창 밖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허리를 흔들며 디스코를 연습하는 장면, 큰형님이 과거 사랑했던 여인과의 댄스를 찬란한 조명 불빛 속에 회상하는 장면, “나이가… 몇개?” “여자는 가고 없는데… 풀꽃 향기는 남더라고.” 같은 대사는 과감할 정도로 촌스러운 동시에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화려한 색깔로 치장했다 해도, 이 영화는 항상 소박한 본성을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

다소 산만한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매끈하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맞을 디스코 경연대회는 그런 약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춤을 모르고 살던 달동네 사람들이 큰형님의 나이트로 몰려들어 생활에 찌들다보니 잊고 있었던 흥을 마음껏 발산한다. 일등하면 꽤 많은 상금도 받게 되니까, 이 일석이조의 기회에 온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카메라는 디스코의 리듬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체조처럼 뻣뻣하게 춤추는 해적과 우정이라도 다짐하는 듯 리듬과 자주 어긋나곤 한다. 이 밖에도 곳곳에 빈틈이 보이지만,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정색하고 비판하기가 왠지 미안해지는 따스한 에너지가 있다. 질주하는 젊음만을 찬미하지 않고 나름의 속도를 고집하는 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재미있게 봐달라고 떼쓰지 않는 정직한 신념이 있는 영화다. 김현정 parady@hani.co.kr

사진설명

1. 우여곡적 끝에 디스코 경연대회 장소에서 탈출한 해적과 봉자. 꿈같은 그들만의 댄스를 시작한다.

2. 가난한 동네에서도 아이들은 씩씩하게 살아간다. 터프한 골목대장 해적과 마냥 착하기만 한 봉팔, 조금은 얄미운 성기. 그들은 동네 최고의 미인이자 해적의 첫사랑인 봉자를 구하기 위해 힘을 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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