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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판타스틱 소녀백서
2002-06-18

당돌한 낙오아들, 유령 세상을 왕따 시키다

■ Story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이니드(도라 버치)와 레베카(스칼렛 요한슨)는 세상 만사에 냉소적인 단짝 친구들. 맘에도 없이 친한 척하는 동창생, 겉멋만 든 남자애들부터 예술에 대한 지적 허영을 가진 미술 선생님, 카페에서 본 사탄 숭배자 커플까지 매사 시시콜콜 비꼬는 게 낙이다. 내심 호감은 있지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 조쉬(브래드 렌프로)에게도 곱게 말하는 법이 없다. 우연히 잡지에서 예전에 스쳐간 여인을 찾는 광고를 본 둘은 장난전화를 걸고, 광고를 낸 시모어(스티브 부세미)를 불러낸다. 시모어는 볼품없는 외모에 레코드 수집광인 중년의 독신남. 장난스런 호기심으로 시모어에게 접근한 이니드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그에게 차츰 빠져든다.

■ Review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업을 갖는 사이, (원작자) 클라우즈의 말을 빌리면 ‘마술 같은 시간’에 놓인 태만한 두 10대에 대한 영화.” 공식 홈페이지에 소개된 문구처럼,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학교와 사회의 점이지대 즈음에서 유예기간을 보내는 두 소녀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이들의 ‘마술 같은 시간’이란, 마치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마술 모자 속을 궁금해하듯 모호하고 불안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무난하게 섞여들기엔 불만스럽고 시시한 세상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외된 이니드와 레베카. 발랄하게 번역, 개명된 한글 제목과 달리,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이들 아웃사이더들의 비타협적인 퉁명스러움과 재기 넘치는 독설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이니드와 레베카는 보통 10대 소녀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할리우드 청춘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대다수 소녀들처럼 외모나 인기, 파티 따위로 고민하지 않는다. 통통한 편인데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이니드는 결코 인기인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게 전부인 양 획일화된 또래문화에 가차없이 조소를 보낸다. 새빨간 원피스에 새빨간 립스틱 혹은 호피무늬 스커트처럼 튀는 패션에서 드러나듯, 남의 시선에 아랑곳 않는 개성의 소유자다. 이니드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남자애들의 눈길을 끌 만큼 예쁘장한 외모가 무색하게 서늘한 말투로 자신에 대한 환상을 깨버리는 레베카도 마찬가지. 염증나는 집단문화에 녹아들거나 자격지심에 허우적대는 대신, 매사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신들만의 유희를 궁리하는 부적응자들의 당돌함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탄탄하던 두 친구의 연대전선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이상기류에 휘말린다. 졸업을 인정받기 위해 여름 동안 미술 보충수업을 듣는 이니드가 여전히 별 계획이 없는 반면, 독립하길 원하는 레베카는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기 때문. 길이 달라진 레베카와 소원해질수록 이니드는 시모어에게 집착한다. 치킨 체인점 본부에서 19년째 대리로 일하고, 중년이 되도록 애인도 없는 시모어는 겉보기엔 낙오자에 가깝지만, 이니드가 꿈꾸듯 봉인된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쉽게 변하는 ‘가짜’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짜배기’를 찾고 싶은 고집과 그 때문에 감수해야 할 소통 불능의 외로움. 세상에 몇장 없다는 원판 레코드, 이제는 거의 사라진 78회전 LP에 담긴 1920년대 블루스와 정통 재즈음악 등을 수집하며 시류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시모어는 이니드와 닮은꼴이다. 시모어의 음반을 들으며 속내를 나누는 이들의 교감은 미묘한 사랑의 빛깔을 띠지만, 외로운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뻔한 해피엔딩으로 치닫지 않는다.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미국의 언더그라운드만화가 대니얼 클라우즈의 만화 <고스트 월드>를 원작으로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딛고 선 땅은 끊임없이 불도저에 밀리고, 복구와 개작의 과정을 거친다”는 클라우즈는, 빠르게 변화하면서 기업화되는 현대의 도시와 문화를 과거의 ‘유령(에 다름없는) 세상’으로 표현했다. 테리 즈와이고프는 미국의 반문화를 대표하는 만화가 로버트 크럼을 다룬 <크럼>, 무명 블루스 뮤지션의 삶을 추적한 <루이 블뤼> 등 2편의 다큐멘터리로 선댄스영화제와 평단의 찬사를 받은 감독. 스스로 1920년대 블루스를 좋아하는 수집광이며, 그런 사적인 취향에 따라 미국 문화사의 잊혀져가는 유산을 재발굴하는 작업을 해온 그는 <고스트 월드>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각본을 공동으로 각색했고, 패스트푸드와 쇼핑몰, 대량 생산되는 유행과 같은 획일적인 문화에 잠식당하는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고스트 월드>의 욕망을 스크린에 살려냈다.

하지만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결코 경직된 설교를 늘어놓는 영화가 아니다. 졸업식 장면의 연설 중 “유머감각을 잊으면 안 된다”는 대사처럼,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한 냉소와 신랄한 풍자로 웃음기를 잃지 않는다. 비디오 가게 점원이 펠리니의 을 찾는 손님에게 <나인 하프 위크>를 내미는 장면으로 문화의 획일성을 은근히 꼬집는가 하면, “만화 같은 가벼운 엔터테인먼트”보다 개념만 그럴싸한 조형물을 높이 평가하는 미술 선생님을 통해 예술에 고정관념을 희화화하는 식이다. 그렇게 킥킥거리며 ‘유령 세상’의 주류에서 이탈한 이들의 걸음을 쫓다보면, 어느덧 온전히 벗어나지도 적응하지도 못한 같은 곳을 맴도는 제 모습도 겹쳐진다. 그들의 여정이 어떠한 결론에도 이르지 않은 진행형이란 점에서 미리 실망할 필요는 없겠지만, 가슴 한구석 안쓰러운 여운이 남는 영화다. 황혜림 blauex@hani.co.kr

사진설명

1. 오늘은 사탄숭배자 커플을 그려볼까. 그때그때 눈에 들어오는 세상 풍경을 만화적인 그림으로 담아놓은 스케치북은 이니드의 일기장과 같다.

2. 원색적인 패션,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널린 방은 만화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3. 장난전화로 불러낸 시모어를 바람맞힌 뒤 뒤쫓아간 이니드와 레베카.

4. 세상에 적응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교감은 두 배우의 호연으로 살아났다.

5. 두 친구에게는 세상 만사가 조소의 대상. 순진한 조시도 예외는 아니다.

6. 옛날 희귀 레코드와 포스터로 가득한 공간처럼, 획일화된 세상의 흐름에서 동떨어진 이니드와 시모어는 서로 닮은꼴이다.

7. 데이트 장소는 이니드가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섹스숍.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하는 시모어는 이니드의 스케치북에 영웅으로 남는다.

▶ 판타스틱 소녀백서 / 황혜림 기자

▶ <고스트 월드>, 만화에서 영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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