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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범죄의 요소
2002-07-30

■ Story

최면상태에서의 플래시백. 13년간 유럽을 떠나 카이로에 머물던 형사 피셔는 복권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여아 연쇄살인의 해결을 위해 유럽으로 다시 소환된다. 스승 오스본의 저서 <범죄의 요소>에 피력되어 있는 이론에 따라 사건을 해결하려는 피셔는 오히려 오스본과 마찰을 빚게 된다. 피셔는 오스본이 숨겨놓은, 용의자 해리에 관한 미행기록을 발견한다. 그리고 범인의 심리에 다가가기 위해 동일한 궤적을 따라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난 미지의 여인 킴의 등장과 함께, 범인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부터 실체를 드러낸다.

■ Review

라스 폰 트리에의 <범죄의 요소>는 <전염병> <유로파>로 이어지는 ‘유럽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면서, 그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도그마의 십자가를 지고 디지털의 언덕을 오르겠다고 약속한 라스 폰 트리에의 자기혁신 선언, 그 이전의 주된 경향을 이 영화에서 마주할 수 있다.

영화는 온통 옐로톤으로 녹아내릴 듯하면서 극장 밖 현실의 잔상을 잊게 한다. 영화 속에서 거대한 늪지대 또는 운하가 되어버린 추상의 유럽은 단지 언어적 명명으로만 지리적 의미를 지켜내고 있다. 그것은 재앙 이후 폐허의 국가처럼 다시 그려진다. 라스 폰 트리에는 저주받은 유럽을 끔찍한 분위기로 가공해낸다! 도그마 선언 이후 ‘현실의 기록성’이라는 새 교리를 따름에도 불구하고, 때론 그 약속을 배신해가면서까지 성취하고자 하는 ‘영화적 환영성’에 대한 라스 폰 트리에의 매혹이 <범죄의 요소> 안에 짙게 배어 있는 것이다.

‘최면’의 화술이 지닌 의미가 바로 영화 자체의 그 환영성과 관련을 맺는다. 일찍이 순서를 뒤바꿔 <유로파>에서 먼저 경험했듯 라스 폰 트리에는 관객에게 최면을 걸기를 좋아한다(최면은 <전염병>에서도 사용된다). <유로파>에서 “당신은 이제 내 목소리를 듣게 된다”라는 암시에 의해 관객은 2인칭의 자리에, 그리고 주인공과의 동일화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당신은 커다란 양철통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더 가까이 오라.” 그순간 주인공이 처음으로 프레임에 등장하면서 우리는 그와 한몸이 된다. <범죄의 요소>에서 최면으로 빠지기까지 최면술사의 모습만 보일 뿐, 대답을 하고 있는 주인공 피셔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이런 계약의 일종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최면술사를 통해, 최면술사는 피셔를 통해 관객에게 말걸기를 하고 있고, 관객은 스크린 밖의 육체로 피셔를 대신한다. 영화의 주인공과 관객을 한자리에 앉히면서 이제부터 볼 것이 환영임을 암시한다. 환영을 누릴 것을 제안하면서도, 결코 그것이 환영임을 잊지 말라는 말이다. ‘당신은 지금 영화를 겪고 있다.’

이후, 내러티브상 최면상태에 빠져든 피셔는 몽환적인 이미지들과 심리적 장면전환들 사이를 거닐고 다닌다. 피셔는 몽유병자와도 같다.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사건은 풀릴 것이 없다. 그는 스승 오스본이 숨겨둔 미행기록을 찾아내, 그것을 따라 살인자 해리의 행동을 반복해본다. 그것이 살인자를 찾아내는 길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러면서 스스로도 모르게 범인 해리의 생령처럼 행동하고 만다. 그런 피셔의 행적은 마치 최면, 주문과 주술, 몽유병을 겪는 표현주의영화의 인물, 또는 더 내려와 누아르의 인물인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니까 <범죄의 요소>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최면을 통해 영화의 환영성뿐만 아니라, 그 환영성의 역사들까지 불러들여 ‘영화의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범죄의 요소>가 영화들에 대한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공포를 자아내며 흐르듯 움직이는 카메라의 무빙은 스칸디나비아영화의 마적 전통을 가르친 벤자민 크리스텐젠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며, 유아 살해라는 이 영화의 동기부여는 프리츠 랑의 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피셔가 돌아다니는 공간들은 표현주의의 기형적 미장센과 구도들을 바탕으로 하고, 그 공간을 담지하는 시간은 뱀파이어의 어둠으로 뒤덮여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주인공 피셔는 칼 드레이어 영화의 주인공들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또는 <블레이드 러너>의 데카드와 동일한 곤란에 처한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어두운 지상에는 누아르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비가 내리고, 그 비가 지상을 채우고 흐르면서 유럽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등장하는 물의 이미지로 넘쳐난다.

라스 폰 트리에가 그의 첫 장편영화 <범죄의 요소>를 환영적 영화의 역사에 대한 주석으로 이루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특히 표현주의와 누아르의 전통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은 여기에 대해 어떤 해석을 가하거나,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비주얼로, 그 느낌으로(!), 충분히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느린 플롯의 속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무척이나 이해하기 힘들게 동떨어져 구성되어 있다. 몇몇의 눈에 띄는 무의미와 불일치까지 포함하여. <범죄의 요소>는 머리보다 눈으로 먼저 감응해야 하는 영화인 셈이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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