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Review] 쓰리
2002-08-20

■ Story

‘공포’와 ‘미스터리’를 키워드로 만든 단편 3편을 묶은 옴니버스영화. 어느 날 집을 나간 아내, 남편(정보석)은 아내가 떠난 뒤 집안에서 헛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길에 쓰러져 있다 깨어난 여자(김혜수),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녀는 쥐고 있던 세탁소 영수증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는다(<메모리즈>). 인형극을 하는 극단의 단장은 만든 자의 혼이 들어 있는 인형의 저주로 귀신이 보이는 환각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죽고 단장의 집에 화재가 일어나는 사건이 있은 뒤 인형은 가면극 단장의 손에 넘어가지만 저주는 끝나지 않는다(<휠>). 입주자 대부분이 짐싸서 나가는 낡은 아파트, 형사와 그의 아들은 이곳에 새로 이사를 온다. 밤마다 근무를 나가는 형사(증지위), 홀로 아파트를 지켜야하는 어린 아들은 맞은편 아파트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빨간 옷의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돌보는 남자(여명)가 살고 있는 맞은편 아파트, 빨간 옷의 여자아이는 그 집 딸이 틀림없어 보인다. 어느 날 아들은 여자아이를 따라나섰다 행방불명이 되고 아들을 찾아나선 형사는 맞은편 아파트의 비밀을 알게된다(<고잉 홈>).

■ Review

한국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즈>, 타이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의 <휠>, 홍콩 진가신 감독의 <고잉 홈> 등 단편 셋이 이어지는 옴니버스영화. 세편 모두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괴담에서도 3개국의 문화적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메모리즈>는 아직 개발이 진행중인 수도권 신도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반면 <휠>은 타이의 현대화된 도시와 관련없는 내용이며 <고잉 홈>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고 오래된 아파트가 배경이다. 공간의 차이에 걸맞게 세 감독의 스타일도 전혀 다르다. 김지운은 차갑고 건조한 금속성의 공포영화를 찍었고, 논지 니미부트르는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같은 느낌을 전하며, 진가신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웃음이 터져나오고 끝내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멜로드라마를 선사한다. 아시아 3개국 영화인력이 힘을 합쳐 시장을 넓힌다는 것이 <쓰리> 제작진의 의도였지만, 일반 관객에겐 자국에서 촉망받는 세 감독의 개성있는 공포영화 세편을 보는 재미가 우선일 것이다.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에 이어 단편영화 <커밍아웃>까지 탁월한 코미디 감각을 보여준 김지운은 <메모리즈>를 유머가 거의 없는 영화로 만들었다(물론 결말을 알고 보면 적잖이 웃긴다. 압권은 총알택시 장면!). “차고 건조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대로 대사도 많지 않고 표정은 심각하며 화면은 무채색톤으로 가라앉아 있다. 마치 첫 장면에서 어떤 하나의 공포나 긴장을 촉발시켰을 때 그것으로 30여분 이상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실험하는 자세같다. 한낮엔 인적조차 드문 신도시 아파트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메모리즈>의 공간은 주로 어둡고 텅 비어 있다. 환영에 시달리는 남자도, 기억상실에 빠진 여자도 대화를 나눌 상대를 찾지 못하는 삭막한 곳이다. 여기서 “소녀가 죽은 곳에 콘크리트를 발라 아파트를 세웠다”는 경비의 증언은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신도시 입구 플래카드와 정확한 대구를 이룬다. 꿈은 이루어지지만, 그 꿈이 악몽임을 이 도시로 진입하는 이들은 알지 못하고 도시를 빠져나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깨닫는다. 상반된 두 세계에 관한 역설은 남자의 집에 걸려 있는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을 통해서도 암시된다. 흰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어둠에 잠긴 집과 가로등을 그린 <빛의 제국>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형상을 헝클어 제시함으로써 충격을 준다(집이 어둠에 잠겨 있다면 하늘도 어두워야 하지만 그림 속의 하늘은 햇빛 찬란한 낮의 하늘이다). 이런 역전은 <메모리즈>가 제시하는 귀신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메모리즈>에서 귀신은 인간을, 인간은 귀신을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공포는 죽은 자가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니다. 기억에서 사라진 것, 무의식의 심연에 있던 것이 슬금슬금 기어올라와 ‘환영’으로, ‘악몽’으로, 혹은 ‘조각난 기억’으로 다가올 때 공포는 현실이 된다.

♣ 진가신의 <고잉 홈>에서 가족사진은 <첨밀밀>의 엔딩 못지않게 따뜻하다(왼쪽부터 첫번째)♣ <휠>은 되풀이되는 인형의 저주를 그린 작품이다.(두번째) ♣ <쓰리>의 세 단편은 감독들의 개성을 드러낸다. <메모리스>(세번째)♣ <휠>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닮았다.

논지 니미부트르의 <휠>은 <잔다라>처럼 운명의 순환을 그리고 있다. 저주받은 인형을 버리라는 단장의 유언,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인형을 되살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인형은 전과 같은 재앙을 불러온다. 감독은 인과응보의 불교적 세계관을 불어넣으려 했다지만 타이판 <전설의 고향>격인 <휠>은 시대에 뒤떨어진 영화로 보인다. 수많은 귀신이야기가 ‘교훈적’인 결말을 맺긴 하지만 <휠>처럼 노골적으로 교훈을 먼저 내세우는 영화를 맘 편히 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세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진가신의 <고잉 홈>은 짧은 단편 안에 웃고 울리고 무섭게 만드는 삼박자를 고루 갖춘 작품이다(그러므로 <휠>을 보다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조금만 참으면 충분히 본전 뽑는다). 실제로 <고잉 홈>은 호러, 코미디, 멜로드라마라는 세 장르가 차례로 전개되는 영화다. 배경은 익숙한 호러영화의 무대. 유령이 나올 듯한 퇴락한 아파트에서 소년은 빨간 옷의 소녀를 본다. 아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가 다가올 때 겁에 질린다. 곧이어 아들이 실종되고 아버지는 아들이 말한 빨간 옷의 소녀가 사는 집을 찾아간다. 2막의 배경은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돌보는 남자가 사는 맞은편 아파트, 형사는 아들을 찾으러왔다 이곳에 납치되는데 여기서부터는 코미디다. 아내를 살리려는 남자와 아들을 찾으려는 남자는 둘 다 너무 진지해서 보는 사람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물론 모든 것은 3막의 멜로드라마를 위한 전주곡이며, 3막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고잉 홈>의 멜로드라마는 폭풍 같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꿈을 안고 중국을 떠나 홍콩으로 온 연인, 그들은 죽은 자를 돌보는 신의 형벌마저 달게 받지만 인간의 편견만은 이기지 못한다. 사랑이 이뤄지는 순간, 연인의 도전은 잔인하게 짓밟히고 그 패배의 쓰라림과 안타까움이 사랑을 위대하게 만든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엇갈리는 시간이 교차편집될 때 <고잉 홈>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성에 다가선다. 관객의 호흡을 아는 진가신의 연출이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과 조성우의 음악에 어울려 어떤 뮤직비디오보다 절절한 감정을 잡아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진가신은 여기 그치지 않고 이 처절한 비극에 다시 따뜻한 결말을 덧붙인다. 죽음의 신과 싸워도 물러서지 않던 그들의 사랑이 부드러운 숨결이 느껴지는 영정사진으로 남는다. 누구든, 이승을 떠나는 길목에서 예쁜 가족사진을 보면 그 사랑을 기억할 수 있도록.남동철 namdong@hani.co.kr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