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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언페이스풀
2002-08-21

■ Story

결혼 11년차인 에드워드 섬너(리처드 기어)와 코니 섬너(다이앤 레인)는 이상적인 부부다. 안정된 직장, 교외의 주택, 착하고 개구쟁이인 아들. 코니는 별다른 욕구불만이나 스트레스 없이 가정주부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코니는 쇼핑을 하기 위해 뉴욕 시내로 나간다. 물건을 잔뜩 들고 택시를 잡으려 하지만 그날따라 한대도 서지 않는다. 거센 바람 때문에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던 코니는 폴 마텔(올리비에 마르티네즈)와 부딪혀 넘어진다. 폴은 물건을 주워주고 택시를 세우려 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잠시 들어가 상처를 치료하고 가라는 폴. 반창고만 붙이고 나온 코니는 에드워드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해준다. 그러나 다음날 코니는 시내로 나가 폴에게 전화를 건다. 갔다가 돌아서기를 반복하던 코니에게 폴이 다가서고 두 사람은 지독한 사랑에 빠져든다.

■ Review

모든 것이 파국으로 귀결되고, 늪에 가라앉은 코니가 상상한다. 처음 만난 폴이 택시를 잡아주던 그 순간을. 상상에서는 택시 하나가 서고 코니가 뒷좌석에 올라탄다.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코니는 유리창 밖으로 ‘고맙다’고 감사를 표한다. 웃으며 헤어지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날 수도 있었다. 충실한 가정주부이며 인자한 어머니로 행복한 미래를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택시는 서지 않았고, 코니는 폴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아니 다음날 전화만 걸지 않았더라도, 다시 폴의 아파트에 찾아가지만 않았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코니와 가정의 목을 조인다.

<언페이스풀>에서 ‘왜’라는 질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에이드리언 라인은 구차하게 원인을 끄집어내지 않는다. 섬너의 가정에 뭔가 부족했다거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냥 서로에게 끌린 것이다. 그게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서로를 갈구한다. 그렇게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고, 예정된 파국으로 달려간다. 그건 운명이다. 운명적인 사랑이란 게 가끔 존재한다. 이성과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근원적인 갈망 같은 것들. 차를 몰고 가다 뉴욕이라는 표지판을 보고는 미친 듯이 방향을 돌려 폴에게 달려가고, 다른 여인과 함께 지나가는 폴을 보고는 바로 달려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과거의 코니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나 폴을 만난 뒤의 코니는 그렇게 행동한다. 그것이 사랑 때문인지, 아니 자신이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인지조차 코니는 알지 못한다. 식탁에 혼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코니는, 자신이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방법이 없다.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가정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내린다.

<나인 하프 위크> <위험한 정사> <은밀한 유혹> 등 에이드리언 라인의 영화는 늘 스캔들을 다뤄왔다. 비일상적인 사랑, 극단적인 광기가 지배하는 사랑 혹은 돈에 이끌리는 사랑까지. <언페이스풀>은 그중에서도 가장 단순하다. 중년 여인의 광포한 사랑. 잘생기고 멋진 육체를 가진 젊은 남자에게 빠진 가정주부. 끈적한 이야기지만, 에이드리언 라인은 쿨하게 그들의 육체를 잡아낸다. 그들의 사랑은 육체다. 달콤하게 속삭이기보다는, 거칠게 서로의 육체를 탐한다. 육체를 잡아내는 에이드리언 라인의 연출은 언제나처럼, 지극히 감각적이다. 폴이 코니의 쭉 뻗은 다리를 응시할 때, 남성 관객이라면 당연히 그 시선에 동조된다. 에이드리언 라인은 육체를 선정적으로 잡아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아니 그 육체의 선정성이야말로, 코니를 폴에게 빠지게 만든 유일한 원인이다.

♣ 코니의 불륜은 잔잔한 중산층 가정에 불어온 거센 태풍이다. 부정을 눈치채고도 평온을 가장하던 남편 에드워드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고 만다. 마치 아내가 지독한 사랑에 빠졌던 것처럼 우연히.♣ 프랑스 청년 폴의 육감적인 매력은 코니의 이성과 자제력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는다.♣ 코니의 불륜 사실이 밝혀진 뒤, 부부는 가족을 지키려 애쓰지만 그들의 마음도 평화로운 가정도 이미 군데군데 금이 가버린 상태다

장 자크 베넥스의 로 데뷔하여 <지붕 위의 기병> <내 안의 남자> <비포 나잇 폴스> 등에 출연했던 올리비에 마르티네즈의 이미지가 튀긴 하지만, <언페이스풀>은 온전히 리처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의 영화다. 리처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은 1984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코튼 클럽>에서 공연했다. 두 사람 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거의 20여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리처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은 중년이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와 <브레드리스>의 바람둥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중년의 리처드 기어에게는 온화한 미소를 짓는 가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때 잊혀졌다가 90년대 중반 재기한 뒤 <저지 드레드> <머더 1600> <퍼펙트 스톰> <글래스 하우스>에 출연했던 다이앤 레인은 <언페이스풀>에서 여전히 ‘섹시한’ 다리를 과시한다. 청춘을 날려보내고, 세월의 무게가 쌓인 얼굴로 돌아온 리처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은 <언페이스풀> 내내 안정된 연기를 보여준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가정까지 등한시하게 되는 여인, 아내의 부정을 눈치채고도 평온을 가장하지만 끝내 일그러져가는 남자의 초상을.

에이드리언 라인의 연출은 한동안 갈팡질팡했지만, <언페이스풀>에서는 세련되고 안정적이다. 에드워드는 부정을 알아채고 조사를 부탁한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에드워드는 어떻게 할까? <위험한 정사>처럼 스릴러로 가지 않을까, 라는 일반적인 예상은 빗나간다. 에드워드와 코니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중산층 부부다. 어떤 돌발적인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들의 행동은 제한되어 있다. <언페이스풀>은 충실하다. 쉴새없이 요동을 치면서 극한으로 치달아가는 에드워드와 코니의 마음과 행동을 치밀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공감하게 만든다. 영원한 사랑과 맹세가 부질없음을 보여주는 <언페이스풀>은 현실적이고, 그래서 보고나면 좀 우울해진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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