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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기`에 대한 강박? 배우들의 열연?<가문의 영광>
2002-09-11

■ Story

어느 날 잠에서 깬 대서(정준호)는 옆에 낯선 여자 진경(김정은)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한다. 광란의 밤을 보낸 흔적은 가득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로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런데 대서의 직장으로 험악한 인상의 세 남자(유동근, 성지루, 박상욱)가 찾아와, 진경의 오빠들이라면서 ‘데리고 잤으면 책임을 지라’고 협박한다. 진경은 호남 최고의 주먹 쓰리제이 가문의 금지옥엽 고명딸이었던 것.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음이 입증되지만, 학벌이 빠지는 것말고는 아쉬울 게 없는 쓰리제이 가문에서 서울대 법대 출신의 벤처사업가 대서를 순순히 놓아줄 리가 없다. 대서를 ‘패밀리’로 끌어들이기 위한 쓰리제이 가문의 결혼추진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 Review

잠결에 다리가 가려워 긁는데, 아무리 긁어도 시원하지가 않다. 다시 보니, 이불 속에 다리가 넷이다. 둘은 내 것이고, 나머지 둘은? 그렇다. 낯선 여자의 두 다리가 내 것과 엉켜 있는 것이다. 생판 모르는 여자와 잠잔 것도 기막힌데, 더 황당한 일들이 줄줄이 터진다. 여자가 이름난 조폭 패밀리의 고명딸이란다. 오빠란 작자들이 몰려와, 빌딩 옥상에 거꾸로 매달면서, 날을 잡자고 성화다.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결혼하거나, 자살하거나.

그날 밤, 그들이 같이 잤느냐, 안 잤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하룻밤의 진실은, 히치콕식으로 말하면, 신비를 품은 채 드라마를 끌고가는, 일종의 맥거핀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만남이 엄청난 충돌과 갈등을 예비하고 있다는 사실. 엘리트 총각이 조폭 패밀리에 사윗감으로 찍히고, 결혼 못하겠다고 버티다가, 상상 불허의 험한 꼴을 겪는다는. 이처럼 <가문의 영광>은 조폭과 민간인의 ‘힘 겨루기’와 ‘문화 충돌’을 다룬 기존의 조폭코미디와 맥을 같이한다. 소재면에서, <두사부일체>의 학벌 콤플렉스와 <조폭 마누라>의 억지 결혼 만들기가 결합해 있다는 것도 재미난 우연.

<가문의 영광>은 조폭코미디의 포장을 벗기면, 로맨틱코미디의 속살을 드러낸다. 조폭집안 여자와 엘리트 청년이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혼으로 떠밀리는 와중에 사랑이 싹튼다는 이야기. 상황 자체가 기막힌 코미디이니, ‘사랑 만들기’에 힘을 실어 진지하게 풀어갔더라도, 충분히 재밌고 우스웠을 것이다. 그런데 <가문의 영광>은 곁가지 에피소드를 나열하며, ‘웃기기’에 대한 강박을 드러낸다. 쓰리제이 가문의 오락거리로 알까기나 룸살롱 출입을 소개하는 것은 한번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라이벌 조직의 도전이 이들 사랑을 다져주는 계기라면, 단발성 폭소를 위한 에피소드 대신 그쪽 이야기가 튼실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결혼식 장면의 비장한 유혈액션이 뜬금없진 않았을 것이다.

요즘 우리가 만난 코미디는 적잖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다. 많은 코미디가 그렇게 관객을 웃기며, 이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대 법대 출신’ 사위 한번 보겠다고 덤벼드는 쓰리제이 가문 남자들의 학벌 지상주의나 가족 이기주의는 차라리 귀엽다. ‘냄비’, ‘깔치’ 같은 비속어가 남발하는 룸살롱 풍경은 썩 유쾌하지 않다. 여성 비하의 혐의는 시대착오적인 순결 이데올로기와도 맞물린다. 대서가 ‘잤네, 안 잤네’로 승강이를 벌이다, 진경의 처녀 증명서를 떼어 보여주자, 쓰리제이는 도리어 화를 낸다. “우리 진경이가 얼굴이 곰보냐, 남보다 배우길 못했냐. 거따가 병원에서 인정해준 숫처녀 아니여!” 적반하장 쓰리제이의 만행에 폭소가 터져야 정상인데, 웃을 수가 없다.

<가문의 영광>이 그래도 즐길 만한 코미디인 것은 배우들의 열연 덕이다. 그중 김정은의 연기는 발군이다. 평소엔 억센 집안 남자들에 짓눌린 뚱하고 소심한 모습이다가, 울끈불끈 다혈질의 집안 내력을 속이지 못하는 에피소드까지 아우르는 코믹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 자리에 다른 배우를 대입해 상상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두사부일체>에서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중간 보스를 연기했던 정준호도 자신의 캐릭터를 뒤집어 패러디하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TV사극 연기를 통해 주로 근엄한 이미지를 선보였던 유동근의 코믹연기도 꽤 신선하다.

♣ 생판 모르는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한 대서는 여자의 오빠들로부터 `결혼할래, 죽을래`식의 협박을 당한다. 단지 서울대 법대 출신의 엘리트라는 이유로.♣ 여자네 집안에 휘둘리는 게 못마땅했던 대서의 부모도 `공포의 상견례` 이후 아들의 결혼을 종용한다.♣ 가문의 업그레이드 작전의 희생양 대서와 진경 사이엔 애틋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가문의 영광>은 엄숙하고 진지한 관객이 아니라면, 재밌게 볼 수 있을 영화다. 웃기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코미디의 본령에 충실한 영화. 쓰리제이 집안에서 결혼을 사수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과 닮아 있다. 하지만 혼란스럽다. 코미디니까, 하고 눈감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인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박은영 cine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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