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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돈냄새 대신 기품과 우아함 그리고 서정성
2002-09-23

■ Story

아르헨티나의 두 소녀 메메와 아니따는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된다. 게다가 언니 메메는 왼쪽 다리에 부상 후유증이 심하게 남는다. 친척을 찾아 우르과이로 옮겨간 자매는 서로 툴툴거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이가 된다. 18살의 메메는 무조건 아이를 갖겠다며 의미 없는 섹스에 집착하고 이로부터 상처를 받으면서 점차 담배와 알코올에 중독된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언니 덕분에 9살의 아니따는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도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 Review

어찌 보면 모든 영화는 관계를 질문 한다. 그 중에 자매 관계는 상대적으로 그리 비중 있는 주제가 되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영역이다. <콩쥐팥쥐>나 <바리데기> <장화홍련> <리어왕> <작은 아씨들> 같은 문학 작품 속에 묘사된 자매의 이야기는 제각각 다른 색깔로 아이들의 감수성에 영향을 끼쳐왔을 것이다. 아이들의 방에서 가장 풍부하고 다감한 이야기가 조잘조잘 쏟아지는 곳도 자매들의 이불 속이 아닐까.

<작별>의 메메와 아니따는 부모와 동생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르헨티나의 '작은 아씨들'이 되어 중산층 멜로 드라마의 여주인공 쯤으로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두아르도 미뇨냐 감독의 상상 속에서 이들 자매는 운명의 숙제를 일찍이 떠안은 고아가 되었다. 감독은 가냘픈 자매의 인생 역정을 서정적인 단순함으로 묘사해나가면서 과연 고통스런 삶 속에도 축복이 있는가를 질문 한다. 메메와 아니따의 이야기는 예상대로 슬프고 안쓰럽다. 그러나 영화가 이 감정에서 머물렀더라면 한 편의 라틴 신파가 되었을 것이다. 미뇨냐 감독은 일종의 가족 드라마라는 틀 속에서 메메와 아니타의 자매애라는 주제를 묘사하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똑같은 상황을 대면하는 인간의 서로 다른 태도, 두 사람의 관계의 역전이라는 미묘한 드라마들을 연속적으로 포진시켰다.

동생을 돌보는 소녀 가장이 된 메메는 자신의 현실을 훨씬 더 민감하게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강하고 본능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상황에 맞선다. 자신의 계획 가운데 어떤 것은 이루고 어떤 것에는 거듭 좌절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메메는 정신적인 허무감과 육체적인 자기 학대를 멈추지 못한다. 반면 언니의 보호막 아래 있던 동생 아니따는 순수하고 낭만적이고 짓궂은 성품을 다치지 않은 채 심신이 건강한 처녀로 성장한다. 어느새 언니는 동생에게 집착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동생은 언니에게 잔소리를 하며 돌보는 보호자의 위치로 그 역할이 뒤바뀐다. 그 와중에 벌어지는 갈등과 질투, 경쟁심, 책임의식 같은 감정적인 부산물들은 두 사람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된다.

♣ 언니 메메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하지만, 아름답고 강한 아가씨.♣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아끼고 의지하는 자매는 둘도 없는 가족이자 친구다.♣ 자매는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고 또 떠나보낸다. 그리고 아니따에게, 마침내 언니 메메와 작별하는 날이 온다.

영화의 무게 중심은 무엇보다 언니 메메에게 놓여 있다. 메메는 행복했던 시절의 가족 앨범을 날이면 날마다 들여다보는 동생에게 그런 건 더 이상 부질 없다고 타박을 한다. 그러나 동생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에 "네가 옳았다"고 적는다. 기억을 공유한 특별한 존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과 작별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 생채기를 입어본 사람이라면 존재와 부재, 기억의 문제가 왜 그리 절실한지를 이해할 것이다. 메메의 마지막 편지는 어쩌면 인생에 혹이 될 수도 있었을 동생이 자기 삶의 구원이었다는 데 대한 구구절절한 감사로 채워져 있다. 어둠 속에서 격랑을 헤쳐가는 배에게 등대가 항해의 유일한 안내자이자 동반자인 것처럼. (이 영화의 원제목이 <등대>이다.) 더욱이 몸에서 마지막 숨결이 빠져나가는 순간에 메메는 커다란 비밀을 발견한다. 그 순간 메메의 눈이 보게 되는 등대 그림 장면은 무척이나 간단한 우화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삶과 죽음에 관한 색다른 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작별>은 죽음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묘사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하다.

독립영화 수준의 예산으로 찍었다는 <작별>은 돈 냄새나 기술적 화려함의 측면에서는 다소 왜소하지만 대신 기품과 우아함, 서정성으로 채워졌다. 극중 인물 앤디가 메메에게 '천국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할 만큼 아름다운 바닷가, 제2의 페네로페 크루즈라는 평판을 얻는다는 26세의 재능 있는 여배우 잉그리드 루비오, 젊은 주역들을 떠받치는 베테랑 연기자들의 앙상블 같은 요소들도 여기에 한 몫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보다 감독의 태도다. 그는 자매의 일상과 심리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시종일관 일그러진 삶에도 천국이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의 답변은 '물론'이다. 많은 순간 영화는 메메와 아니따의 얼굴을 밀착하여 클로즈업 한 화면으로 채워진다. 이것은 이례적이고 따뜻한 심리적 관계를 묘사하려는 의지의 산물일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영화의 결말까지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천상의 사랑을 건설했던 자매의 분투를 알아듣게 된다. 찾고자 하는 의지 앞에서는 우주의 어떤 비밀도 더 이상 숨어 있지 못한다.

에두아르도 미뇨냐 감독은 <에비타, 민중의 소리를 들으려 했던 그녀>(1983)로 데뷔한 뒤 <가을의 태양>(1996)이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지명도를 확보했다. 스페인, 아르헨티나 합작인 <작별>은 스페인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고야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고, <탈주>(2001) 역시 고야상과 아르헨티나 내부의 권위 있는 상을 석권했다. 메메 역의 잉그리드 루비오는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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