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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되지 않는 반항아 신세대 첩보원 <트리플 X>
2002-10-01

■ Story

스포츠카, 오토바이, 패러글라이딩을 비롯한 익스트림 스포츠의 달인 젠더 케이지(빈 디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구속당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가는 젠더에게 스파이 제의가 들어온다. 정부를 위해서 한 가지 임무를 하던가, 익스트림 스포츠를 포기하고 독방에 갇히던가,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선 것이다. 독에는 독,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범죄자를 범죄 조직에 침투시키자는 NSA 요원 기브슨(새뮤얼 L. 잭슨)의 주장 덕분에 젠더는 동구의 프라하로 가야 한다. 기존의 첩보원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구소련군 출신의 범죄조직 ‘아나키 99’에 침투하는 것이 젠더의 임무. 마침 보스의 동생이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인 덕에 젠더는 전혀 의심받지 않고 아나키 99의 근거지인 고성에 들어가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한다.

■ Review

<트리플 엑스>는 21세기판 <007>이다. 그는 국가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 아니 논다. <트리플 엑스>의 첫 장면은 국회의원의 차를 훔쳐서 질주하다가 절벽의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젠더의 모습이다. 의원의 차를 훔친 이유는 하나다. 그 국회의원은 랩음악과 컴퓨터 게임을 규제하는 법안을 상정했다. 자신의 취향을 타인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을 가진 젠더는 당연히 그를 응징한다. 이처럼 남의 차를 훔치고 부숴버리는 젠더는 그러나, 기존의 범죄자와는 다르다. 젠더는 저항정신으로 똘똘 뭉친 안티 히어로가 아니다. 그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 한 자신 역시 무엇에게도 침해받지 않겠다는 일념뿐이다. 굳이 범죄를 저지를 생각은 없지만, 사회가 자신을 구속하면 과감하게 법도 무시하겠다는 아나키스트.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아나키 99의 보스는 젠더를 자신들과 동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젠더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침해하지 않고, 지배하거나 억압하지도 않는다.

기브슨과 젠더의 관계도 명령을 내리고 그걸 수행하는 상명하복의 위치가 아니다.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일종의 타협을 한 젠더는 목숨이 걸린 스파이 활동을 하면서도 자유롭다. 아나키 99의 근거지를 알려주러 함께 온 경찰을 태연하게 밀고하고, 기브슨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도 않는다. 기브슨도 알고 있다. 신분이 노출되었으니 돌아가라, 고 명령하면 젠더는 돌아가지 않고 성으로 다시 갈 것이라는 사실을. 기브슨은 청개구리처럼 행동하는 젠더의 특성을 알고 적절하게 활용한다. 기브슨과 젠더는 서로의 생각을 넘겨짚으면서 일종의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젠더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고, 기브슨은 그런 젠더를 굴려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낸다.

<트리플 엑스>는 ‘쿨’과 스릴에 목숨을 거는 신세대 첩보원의 특질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화끈하고, 빠르다. 캐릭터의 특징도 날카롭게 잡아낸다. 하지만 큰 실수도 있다. 화학무기가 터질 위기가 닥치자, 갑자기 젠더가 연설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멍청한 짓만 해왔는데 이제는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그 대사를 들으면 실소가 터진다. 그 대사야말로 기껏 영화 속에서 구축해왔던 젠더의 개성을 지워버리는 도식적인 사고다. 이미 빈 디젤이라는 배우와 젠더의 캐릭터는 21세기로 진입했는데 여전히 누군가 과거의 이데올로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집단적인 책임감은 젠더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옐레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하는 것이 젠더의 캐릭터다. NSA에게 테스트를 받을 때 처음 본 동료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처럼, 그냥 한 여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어울린다. 국가나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욕망과 애정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젠더에게 목숨이란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니다. 즐기기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바쳐야 한다면 그냥 쿨하게 바칠 수도 있는 것이다.

빈 디젤을 기용했던 <분노의 질주>에서도 이미 증명했듯이, 롭 코언 감독은 속도를 이용한 다양한 액션에 재능을 보여준다. <트리플 엑스>는 익스트림 스포츠의 달인인 젠더가 벌이는 갖가지 ‘질주’가 눈을 즐겁게 한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나만이 맛볼 수 있는 극한의 자유를 만끽하는 익스트림 스포츠의 쾌감은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다가, 눈 덮인 산 위에서 거대한 눈사태를 뒤로하고 스노보드를 즐기는 장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거짓말이라는 게 뻔히 보이지만, 그래도 즐겁다. 뉴에이지를 대표하는 첩보원으로서 젠더 케이지는 부족함이 없다. <트리플 엑스>의 속편은 충분히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단 젠더가 조직의 일원으로 전락하지만 않는다는 조건에서. 언제까지나 젠더는 조직에 소속되지 않는 반항아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젠더는 감옥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 자유없는 질주는 각본이 짜여진 쇼에 불과하니까.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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