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의미를 헤아리다. <비밀>
2002-10-08

■ Story

모녀지간인 나오코(기시모토 가요코)와 모나미(히로스에 료코)를 태운 버스가 눈 덮인 산길을 달리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엄마 나오코는 죽고, 딸 모나미는 깨어난다. 그런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딸은 자신이 모나미가 아니라 나오코라고 주장한다. 말이나 행동이 영락없는 아내인 모나미를, 아버지 헤이스케(고바야시 가오루)는 아내 나오코로 느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집에선 아내 나오코로, 밖에선 딸 모나미로 ‘이중생활’을 하는 ‘아내/딸’과의 동거가 순탄할 리 없다. 대학생이 된 ‘아내/딸’이 모나미로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헤이스케는 혼란과 갈등에 휩싸인다. 남편으로 살 것인가, 아버지로 살 것인가.

■ Review

영혼이 다른 이의 육신에 깃드는 ‘빙의’ 현상은 일본 대중문화의 트렌드라 할 만큼 인기 높은 설정이다. 한때 호러나 스릴러의 단골 소재였던 이 섬뜩한 초자연적 현상은 이제 동성으로 또는 오누이로 만난 연인의 기구한 사랑 등 판타지 멜로에서도 즐겨 다루는 소재가 됐다. 모녀 사이의 빙의를 목격하는 아버지의 운명을 그린 <비밀>도 그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딸의 몸으로 돌아온 아내. 스토리라인으로만 보면 <비밀>은 기존의 어떤 유사 소재 작품보다도 선정적인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비밀>은 부녀이기도 하고 부부이기도 한 기묘한 남녀관계가 불러일으키는 성적, 심리적 긴장감을 놓지 않으면서도 근친상간의 질척대는 선정성을 피해간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비밀>은 놀랍게도 밝고 유쾌한 영화다. 아내는 죽고, 딸은 기사회생하지만 남자는 슬퍼할 겨를이 없다.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딸은 남자를 ‘아빠’가 아니라 ‘여보’라고 부른다. 그뿐이 아니다. 남자의 수염 돋은 턱을 강아지 쓰다듬듯 어루만지는가 하면, 부부가 처음으로 데이트한 장소를 맞히고, 심지어 첫 섹스 때 다리에 쥐가 났던 일까지, 아내만 알 법한 비밀스런 기억들을 줄줄이 꿰고 있다. 딸의 육신에 깃든 아내의 영혼을 느끼게 된 남자는, 집에선 아내로 밖에선 딸로 살아가는 ‘아내/딸’과의 동거를, 담담하게,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인다(그렇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코미디다). 딸의 영혼을 애도하는 것도 잊을 만큼 아내의 귀환을 기뻐하고 재밌어하는 남편의 캐릭터는 ‘우리 정서상’ 좀 기이해 보이지만 말이다.

물론 그런 남편에게도 애환이 없는 건 아니다. 남자는 소녀에게서 여인으로 성숙해가는 ‘아내/딸’에게 젊은 남자가 구애하는 것을 보고 질투에 휩싸여, “내 딸은 너와 사귈 수 없다. 우린 너와 사는 세계가 달라. 우리는 외계인이다”라는 황당한 이유를 들며 밀쳐낸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피 끓는 남자로서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딸의 육신으로 돌아온 아내를 차마 품지 못한다. 이 딜레마는 우습고 또 슬프다. 그들은 더이상의 이중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아내와 남편이든, 딸과 아버지든, 어느 한쪽 관계는 청산해야만 한다. 어떻게? 그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비밀’이다.

♣ 헤이스케는 속 깊은 아내, 사랑스러운 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아내와 딸이 불의의 교통 사고를 당한 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내의 영혼은 딸의 몸을 통해 헤이스케에게 돌아온다.♣ 헤이스케는 딸의 몸에 아내의 영혼이 빙의됐다는 것이 오히려 즐겁다. "우리 셋이서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거야." 그러나 이중생활은 위기를 맞고, 부부와 부녀, 둘 중 한 관계를 정리해야 할 시점이 찾아온다.

<비밀>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의미를 헤아리게 하는 미스터리 멜로지만, 이 세상 모든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판타지로도 읽을 수 있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에 숨은 두 차례의 반전, 그 배경을 설명한다. <만춘>의 아버지가 <신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버지에게 딸은 끔찍이도 사랑스러워 떠나 보내기 힘든 존재다. <비밀>은 딸의 육신에 아내의 영혼을 불어넣어서라도 영원히 곁에 두고자 하는 ‘부성’의 판타지다. 동시에 어머니가 딸의 싱싱한 육체와 창창한 미래를 물려받는다는 설정도 의미심장한데, <비밀>의 어머니는 교복 치마를 줄여 입고, (딸의)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으며, 자기 안에서 세대 차이를 줄여나가는가 하면, 학업과 서클 활동과 연애(!)에 의욕적으로 매달린다. 딸의 역할을 대리하는 설정은, 회춘과 아울러 새출발을 꿈꾸는 어머니의 판타지인 것이다.

데뷔작으로 에드거 앨런 포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이래, 최근작 <백야행>까지 독특한 스릴러 소설을 발표해온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소설이 원작. 출간 당시 30여개 영화 제작사가 판권 구매 경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코믹SF <사무라이 픽션>의 시나리오 작가 사이토 히로시가 각색을 맡아서인지, 원작소설보다 밝고 가벼운 분위기로 영화화됐다. 1999년 일본 개봉 당시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연기상을 휩쓸었고, 스페인 시체스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이탈리아 우디네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