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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미 보다 촌스런 느낌의 `열혈 촌놈극` <남자 태어나다>
2002-10-08

■ Story

영남 지방의 작은 섬 마이도의 최고령 할아버지가 99번째 생일을 맞아 한 말씀 하신다. “내가 가슴에 맺힌 게 있다. 우리 마을에 대학가는 놈 하나 맹글어서 이 섬을 세상에 알리라.” 마을에 대학갈 나이의 청년은 대성(정준), 만구(홍경인), 해삼(여현수) 셋인데 다 공부를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셋에게 권투를 가르쳐서 권투 특기생으로 대학에 보내기로 하고, 프로권투 경력이 있는 왕 코치(이원종)를 선생으로 섬에 데려온다. 왕 코치 환영파티를 열고 마을회관에 링을 짓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당장의 목표는 경남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우스우면서도 절박한 동기 아래 맹훈련이 시작된다.

■ Review

이 영화의 권투는 많은 걸 담고 있다. 외지 섬마을 청년들의 성공을 향한 꿈으로 보면 <록키>이고, 오합지졸들이 모여 뭔가를 해내는 이야기로 치면 <으랏차차 스모부>의 스모와 같다. 특별한 뉴스가 없는 섬마을 사람들에게 불어닥친 축제 같은 이벤트라는 점에선 <쿨 러닝>의 봅슬레이인 셈이다. 이기고 지고에 상관없이 나름의 자신감과 보람을 얻은 청년들을 비추는 후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의 권투는 <반칙왕>의 레슬링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스포츠를 매개로 한 휴먼드라마가 지닌 여러 모티브들을 다 끌어안고 있다. 거기에 영화의 배경인 80년대에 대한 시대적 향수까지 얹으려 한다.

욕심이 많아서 두서가 없을 것 같은 우려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남자 태어나다>는 여러 가지 모티브들을 무난하게 엮어낸다. 어떤 모티브는 잘 살아나고 어떤 건 표피적으로 언급만 되는 불안함이 있지만, 이야기의 중심축이 살아 있다. 그 중심축은 세 청년과 왕 코치의 갈등, 불화, 화해이다.

세 청년에게 권투는 본토(?)에 상륙해 어엿한 대학생이 되게 해주는 희망이지만, 글러브 한번 껴본 적 없는 이들에겐 너무 막연하다. 막연해서 불안하고, 불안하니까 의지가 약해진다. 훈련하다가 자꾸 다른 데 가서 놀고 싶고, 성패가 불확실한 걸 가지고 싸우라며 공자말씀 같은 교훈을 외쳐대는 코치도 짜증이 난다. 코치가 복싱선수권대회에 접수하러 간 날, 셋은 나이트클럽에 놀러간다. 모처럼의 외출에서 동네 양아치들을 만나 패싸움을 벌이다 도망나온다. 바닷가 제방에서 만구와 해삼이, “양아치 새끼들”하며 분을 못 참아 허공에 발길질을 해댄다. 대상없는 발길질, 그 분노의 대상은 결국 자기 열정과 열패감일 터. 시퀀스마다 인과관계를, 어떨 때는 촌스럽다 싶을 정도로 꼭 맞춰주는 이 영화에서 의외로 길게 찍힌 이 발길질 장면은 빛을 발한다. 이들이 정말 젊고, 정말 무기력감에 빠져 있음이 전해진다.

왕 코치는 전력이 형편없다. 프로전적 7전2승5패에, 2승도 한번은 기권승이고 한번은 상대선수가 반칙을 해서 이겼다. 그러면서도 선수생활이 화려했던 것처럼 자랑을 해대고, 청년들을 고무시키기 위해 비현실적일 만큼 낙관적인 말들로 일관한다. 대책없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실은 청년들의 무기력감을 알아챈 속깊은 대응책이다. 왕 코치 자신이 루저(패배자)의 생리를 잘 아는 루저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그걸 모르고 왕 코치를 불신한다. 나이트클럽에 갔다온 뒤 왕 코치에게 기합을 받다가 해삼이 대든다. 당신은 한 게 뭐 있냐고, 당신이 큰소리칠 자격이 있냐고. 왕 코치는 풀이 죽어 떠나고, 청년들은 뒤늦게 후회하고서 왕 코치를 쫓아가 매달리고, 왕 코치는 돌아오고…. 흔한 구성이지만 외진 섬이라는 배경과 질박하게 표현된 왕 코치의 캐릭터에 힘입어 이 루저들의 연대기가 나름의 진솔함을 얻는다.

♣ 권투 특기생으로 대학에 가자는 목표 아래 마이도의 세 청년은 맹훈련을 시작한다. 달릴만한 평지가 없는 작은 섬에서 가파른 돌산과 해변의 자갈밭은 유격장 같은 훈련소로 변한다.♣ 세 청년이 왕 코치와 한바탕 불화 끝에 신뢰가 쌓이는 것과 비례해, 대성과 사랑 사이의 사랑도 깊어간다. 대성은 "나의 꿈이 돼줄 수 있겠니?"라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사랑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시합장으로 간다.

흠잡을 데도 많다. 대성과 서울에서 내려온 여대생 사랑(김사랑)의 러브스토리는 도식적이다. 사랑이 동네 양아치들에게 희롱당하려 할 때마다 대성이 나타나 구해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부모에게 양아치로 오해받아 파출소까지 간다. 양아치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 용도는 오로지 웃기기 위함이거나 사랑 앞에서 대성에게 얻어맞기 위해서이다. 양아치와 대성의 싸움도 그렇고, ‘남자는 어때야 해’ 하는 식의 대사가 유달리 많은 이 영화는 ‘루저들의 연대기’ 답지 않게 가끔 마초적인 남자 세계를 기웃거릴 때가 있다. 제목도 ‘남자 태어나다’이다. 그러나 위험할 정도로까지 느껴지지는 않는다. 되레 이런 대목이, 전체적으로 세련됐다기보다 촌스런 느낌을 주는 연출과 어울리는 면도 있는 듯하다. 이 영화 카피도 ‘열혈촌놈극’이다.

어색한 경상도 사투리 구사가 이따금씩 귀에 거슬리고, 과장된 에피소드도 많아 영화 보는 동안 머릿속의 평점이 왔다갔다 하지만 결말은 신선하고 주제에도 충실하다. 잘 짜여진 시나리오와 욕심없고 약간은 촌스러운 연출이 만나 소박한 뒷맛을 남긴다. 임범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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