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단편] 어디 갔다왔니?/히치콕의 어떤하루/필통,낙하,시험
2002-10-22

→ 어디 갔다왔니? ←

■ Story

무더운 여름날 중국집의 어떤 하루. 주방장은 라디오를 켜고 음식 준비를 시작한다. 쥐는 주방을 휘젓고 다니고,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바깥에서 사사건건 간섭하며 명령한다. 주방장은 어느 결에 잠에 빠져든다. 자신은 쥐가 되고 주인은 자신이 되어 쫓고 쫓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잠에서 깨어난 주방장은 물에 빠져 있는 쥐를 보내주고, 주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는다.

■ Review

<어디 갔다왔니>는 권력의 관계를 공간의 점유에 비유하는 영화다. 카메라는 대부분 주방이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다. 출연하는 두 명의 인물 모두가 단 한마디의 대사조차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공간을 사이에 두고 명령하는 자와 따르는 자 사이의 갈등이 빚어진다. 영화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관계가 행위와 소리들로만 집중되도록 배려한다. ('요리사'라기보다)주방장은 때때로 쥐를 쫓으면서 쉼 없이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주인은 주문대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일만으로 주방의 모든 권력을 휘어잡으려고 든다. 주방 안에 걸려 있는 모자와 옷만으로도 주인은 바깥에서 안으로의 명령체계를 확실히 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주방장-쥐의 관계는 자신이 쥐가 되는 것을 경험하는 주방장의 꿈 이후 변화한다. 주방장은 물에 빠진 쥐를 살려 보내주고, 양파로 문을 막아버린 채, 느긋이 담배를 피운다. 공간을 벗어난 쥐의 생명과 공간을 확보한 주방장의 자유는, 그럼으로써 동일한 의미가 된다.

→ 히치콕의 어떤 하루 ←

■ Story

촬영장으로 향하는 히치콕의 어느 하루를 에니메이션으로 상상해본다. 50여편의 히치콕 영화들 중, 이미 익숙하게 알려져 있는 영화 속 인물들이 히치콕의 옆을 스쳐가거나 그와 맞부딪치며 영화들의 사건을 다시 그려낸다.

■ Review

잠에서 깨어나 촬영장에 도착하기까지 <히치콕의 어떤 하루>는 히치콕'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히치콕적이라는 말은 분열의 징후들을 거둬내고 남은 유머의 조합들로 남은 것들만을 상상해야만 한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재치 있게 반복되고 더러는 바뀌어지면서, 에니메이션의 상상력으로 불려나온 히치콕의 많은 영화들이 길거리를 뛰어다닌다. 비행기에 쫓기는 캐리그란트, 심벌린 연주자, 메모리씨, 사이코살인마, 그들의 모습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즐겁기만 하다. 그런 점에서 에니메이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거나, 심심했을 만큼 독특하게 시각을 채우는 장면들이 이 영화에는 많다. 히치콕을 스쳐지나가는 인물들은 한 쇼트 안에 동시에 등장하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영화들의 쇼트로 연결되어 스토리를 진행시켜 나가기도 한다. 히치콕 영화의 아이콘들이 되어 버린 인물들이 히치콕의 영화가 아니라, 히치콕 자신을 둘러싼다. 그러나 히치콕에 관한 어떤 어려운 이야기도 이 안에는 없다. 처음부터 유머에 초점을 맞춘 채로 순서를 뒤바꾸고 상황을 조합함으로써 히치콕 영화의 조각들은 서로서로 스토리를 쌓아가며 히치콕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끌어들인다. 이제 드디어 그도 까메오를 벗어난 것이다! 히치콕에 관해 짧지만 유쾌하게 그려진 귀여운 오마쥬.

→ 필통, 낙하, 시험 ←

■ Story

시험시간에 맞춰 아파트를 뛰어가던 소녀는 필통을 계단 밑으로 떨어뜨린다. 필통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은 남김없이 부서지고, 소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시험을 망쳐간다. 그러다가 소녀는, 문득 선생님이 읽어 주시는 지문을 따라 그날 아침의 일을 ㄱ. ㄴ. ㄷ. ㄹ의 가능성들로 상상해보기 시작한다.

■ Review

이 영화의 제목은 <필통낙하시험>이 아니라 <필통, 낙하, 시험>이다. 이렇게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필통과 낙하와 시험이 도대체 무슨 '관계'를 이루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 각기 동떨어져 있는 세 가지 단어들이 소녀의 하루를 뒤바꿔놓는다. 필통은, 낙하하고, 시험은, 망쳐지고. 이것은 이미 되돌려 놓을 수 없는 시간을 따라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 우연한 일상의 사건으로부터 소녀는 잠재적인 시간의 가능성들에 의문을 던져 보는 경험을 한다. 또는 경험을 통해 상상에 이르는 것이다. 선생님이 읽어 내려가는 지문의 나열에 맞춰 소녀는 상상한다. 만약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다른 일들이 일어났더라면 어떠했을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떨어지는 필통을 가까스로 잡았거나, 가까운 곳에 떨어졌거나, 줄을 던져 끌어올렸다면, 이라고 상상한다. <필통, 낙하, 시험>은 단일한 사건의 경험으로 잠재된 행위들을 상상하도록 하는 가능성의 시간구조에 대해, 그리고 그 세 가지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벌어지는 연쇄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므로 결말에서, 그것을 하나로 묶어 실험해보는 소녀의 시도는 바로 '필통낙하시험'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