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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하지만 유쾌하고 허술하지만 흥미로운 오묘한 조화,<몽정기>
2002-10-29

■ Story

중학교 3학년인 동현(노형욱)은 막 성적 호기심이 왕성해진 소년.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섹스에 대한 궁금증을 토로하지만 깨달음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여자 교생선생님들이 찾아온다. 그중 동현의 반을 맡은 유리(김선아)는 동현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동현은 비오는 날 유리에게 우산을 받쳐주면서 연정을 키워간다. 하지만 유리가 이 학교에 온 데는 남모르는 비밀이 있다. 옛 스승인 동현의 담임선생님 공병철(이범수)을 짝사랑했던 것이다. 유리가 공병철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애쓰는 동안 동현은 유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과연 동현과 유리의 짝사랑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인가?

■ Review

<아메리칸 파이>를 본 관객이라면 미국의 10대 소년들이 맥주잔과 파이에 무엇을 빠뜨렸는지 기억할 것이다. 한국판 <아메리칸 파이>격인 <몽정기>에서 소년들은 맥주잔과 파이 대신 참외와 컵라면을 택한다. 이 걸쭉하고 질퍽한 성적 농담의 세계는 비위약한 관객에겐 혐오감까지 줄지 모르지만 남자아이들의 성장에선 거의 필수불가결한 관문이다. 여성의 음부를 지칭하는 특정 단어만 나오면 오금을 못 쓰는 소년은 그런 면에서 상징적인 존재라 할 만하다. 소년은 여자의 몸을 알면 어른이 된다고 믿지만 <아메리칸 파이>의 교훈대로 성적 호기심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발전한다. 섹스코미디의 어감이 분명한 <몽정기>는 이즈음에서 멜로드라마라는 속살을 드러낸다. 중학생 동현은 교생 유리를 짝사랑하는 동안 유리는 예전에 자기를 가르쳤던 선생님을 잊지 못하는 삼각관계가, 누구나 한번 (겪어)봤음직한 옛 기억을 더듬게 한다.

“암울한 시대가 아니라, 아름답게 기억되는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서의 80년대를 그리고 싶은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정초신 감독의 말은 <몽정기>를 판타지로 읽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리가 보잘것없는 노총각 공병철을 ‘테리우스’라 부를 때 어이없어하며 웃을지언정 의문을 제기해선 안 된다. 심각한 태도로 본다면 마땅히 궁금해할, 몇년간 공병철 선생님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열심히 사범대 수업을 들었을 유리의 행적도 캐묻지 않는 편이 이롭다. 그런 식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판타지로서 <몽정기>가 담고자 하는 정서는 라디오 방송에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을 적은 엽서를 보냈던 시절의 순박한 설렘에 있다. DJ의 한마디에 용기백배 장미꽃 한 다발을 사들고 그녀의 집 앞까지 뛰어갔던 동현처럼 결국 좌절하지만, 수십번 편지를 고쳐쓰던 불면의 밤을 영화는 어렴풋이 되살린다. 그것은 동현, 유리, 공병철이라는 세 인물이 실은 다르지 않기에 가능해진다. 유리는 어찌하여 공병철 선생님에게 연심을 품게 되었는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던 밤, 우연히 함께 가게 처마에서 비를 피하고 집까지 뛰어가 우산을 가져온 동현의 모습은 수년 전 유리의 학창 시절 그대로일 것이다. 유리가 공병철에게 처음 사랑을 느낀 순간을 이야기할 때 동현과 유리는 성별만 다를 뿐 같은 인물로 느껴진다. 동현과 공병철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공병철의 숙맥 같은 태도는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다. 유리가 야한 옷차림을 하건 사랑고백을 하려 하건 눈을 맞추지 못하는 공병철은 ‘한번 학생은 영원한 학생’이라는 식의 케케묵은 신념을 토로한다. 유리를 만나면서 노총각 공병철도 동현처럼 여성의 매력에 눈을 뜬다. 동현의 성장영화인 <몽정기>는 은연중에 공병철의 성장영화를 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 인물의 사랑이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을 안타깝게 하는 쪽은 짝사랑을 하는 주체인 동현과 유리의 이야기다. 동현이 유리를 모욕하려는 친구를 가로막을 때, 체육대회에서 일등을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때 <몽정기>는 남성 호르몬이 아닌 사랑의 힘을 설파한다. 유리가 공병철의 사기 진작을 위한 묘수를 강구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비에 젖은 옷차림으로 엉뚱한 포즈를 취할 때 <몽정기>는 성적 농담을 넘어 흐뭇한 미소를 만들어낸다. 공병철의 위치가 애매해지는 것은 이즈음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유리의 편지를 되돌려주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비오는 날 유리와 데이트를 하고 춤을 추며 기뻐하던 모습과 상반된 것이기에 당황스럽다. 공병철은 왜 유리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멋진 클라이맥스를 만들기 위해서’다. 공병철이 유리의 고백을 무시함으로써 동현은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처럼 그녀의 행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멋진 남자가 될 기회를 맞는다.

<몽정기>는 단점이 쉽게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과도한 성적 농담, 어색한 편집, 부족한 소품 등이 매끄러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일찌감치 접게 한다. 허술한 면을 애써 감추지 않으면서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는 눈높이를 낮추더라도 10대의 판타지에서 기대하는 해피엔딩의 감흥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쪽이다. 그것은 이범수의 어리숙한 표정과 김선아의 신선한 코믹연기가 이루는 조화처럼 오묘하다. 유치하지만 유쾌하고, 허술하지만 흥미롭다. 느닷없는 장면에 아연실색하면서도 낄낄거리며 볼 영화라고 할까? <몽정기>는 몸에 비해 머리가 덜 자란 소년이지만 그런 소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 영화다.남동철 namd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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