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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을 동경하던 한 여자의 심장에 관한 영화,<밀애>
2002-11-04

■ Story

30대 초반의 주부 미흔(김윤진)은 어느 날 갑자기 집안으로 뛰어든 남편의 애인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미흔의 건강이 여의치 않자 남편(계성용)이 나서서 남해안의 한 마을로 거주를 옮긴다. 이웃에 사는 인규(이종원)가 미흔에게 게임을 제안한다. 4개월간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누되 사랑한다고 발설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탐닉으로 시작된 둘의 관계는 격렬함을 향해 치닫는다.

■ Review

유순하고 청결하고 어떤 야릇한 연약함을 가진 여성이 남편의 외도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회복할 길 없는 상처를 시위라도 하듯이 그는 오래도록 방황한다. 그러니 설혹 불륜에 빠지더라도 그것은 은연 중에 남편의 책임이기도 하다.

<밀애>의 프롤로그로부터 이런 냄새를 맡았다고 해서 이 영화가 분노와 눈물을 뒤섞은 페미니스트 신파쯤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그건 당신의 속단이다. 미흔(김윤진)의 육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남편의 외도를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고 할 것이다. 미흔의 몸은 마치 탈출을 위해 어딘가 빗장이 열리기를 기다려온 마그마처럼 끓어오른다.

그러니 이 영화는 발칙하다. 발칙하다는 말은 존중받도록 되어 있는 어떤 근엄한 것에 도전하는 것에 붙여진다. 그래서 발칙한 것들이란 대체로 호응과 질타로 양분된 격렬한 반응에 휩싸이고, 그런 반응 자체가 엄숙하게 고정되어 있던 세계의 한 귀퉁이를 무너뜨린다. 작가들은 그중에서도 불륜이라는 테마를 사랑한다.

불륜은 가족제도의 틀을 벗어난 성애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부일처의 단혼 소가족을 바탕으로 삶의 틀이 유지되는 체계를 고안한 현대사회에서 성애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는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다. 반면에 인위적으로 짜여진 질서에 반발하려는 작가들은 끊임없이 그 문제를 건드린다. 그 도발이 지루한 수준이면 통속적인 3류 드라마가 되고, 무언가 팽팽한 긴장을 지니고 있을 때에는 제도에 대한 개인의 반발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된다.

<밀애>는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해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우선 영화는 미흔이 관객에게 어떤 핑곗거리를 가지지 못할 만큼 그의 일탈을 멀리까지 끌고가버린다. ‘그럴 만도 하지, 남편이 너무 했어’라거나 ‘저 정도면 복수한 거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뭐 심한 짓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식의 변명이 안 통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남편을 혼자 남겨두고 잠옷 바람으로 창문을 넘어 애인의 집에 찾아들었다가, 위험한 짓은 하기 싫다는 남자로부터 퇴짜를 맞고 와서는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한다. 핑곗거리 뒤에 숨어서 도전적인 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밀애>는 페미니즘의 울타리 안에 있는 보수주의자들과 어느 정도 결별했다.

이 영화는 또한 육체의 욕망을 복권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미흔과 인규(이종원)의 첫번째 정사 장면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공을 들였을 뿐만 아니라, 원작소설이 갖고 있는 언어의 묘사력에 상응하는 영상의 묘사력을 보여준 장면일 것이다. 단지 육체에 대한 매혹만으로 사랑을 출발시킨 두 사람은 서로의 심금(心琴)이 아닌 육금(肉琴)을 정교하게 울릴 수 있는 숙련된 연주자의 자질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제도가 허용하지 않은 사랑은 불법이고 정신적인 사랑이 없는 사랑은 타락이라는 사랑의 신화가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두 주연배우의 적절한 감정 표현과 아울러, 어둠과 역광의 조화로 얻어낸 묵직하게 밝은 인상주의 톤의 조명, 숙련된 달리 맨의 덕을 본 정교한 이동 등을 통해 상당히 성공적으로 연출되었다.

<밀애>는 아마도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하나의 남성 캐릭터를 끌어낸 영화로도 기억될 만하다. 대한민국에 바람 피우는 남자는 매우 많고 개중에는 쿨 하게 밀고 나가는 남자도 없지 않을 테지만 인규처럼 권태롭게, 죄의식은커녕 자의식도 없다는 듯이 멀뚱한 느낌으로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 스크린에 주인공으로 나타난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권태란 육체가 한가한 사람들이 햇빛이든 고요든 일탈이든 구속이든 무언가가 숨을 막히게 할 만큼 많아서 시시해 미칠 것만 같다고 느끼는 것을 뜻한다. 권태는 현대성의 본격적인 도래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권태에 사로잡혀 게임을 하듯 불륜을 저지르는 남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지극히 징후적이다. 인규라는 캐릭터는 한국의 멜로드라마가 모더니즘 영화로 비약하는 과도기적인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왼쪽부터 차례로)♣ 남편의 애인이 집안을 침범한 어느날 이후, 미흔의 삶에는 균열이 생긴다. 결혼생활에도, 미흔의 내부에도 더이상 안온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윗집 사는 의사 인규는 미흔에게 사랑 대신 섹스만 하는 게임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육체에 대한 매혹만으로 사랑을 시작한다.

남해안의 공간과 빛도 인상적이다.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공간을 포착하는 영화는 일단 지지해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나 영화의 앞뒤로 붙은 페미니스트 신파의 기색은 “이런 건 가벼워야 하는데”라는 인규의 대사에 담긴 염려 그대로 이 영화를 무겁게 만든다. 폴란드에서 온 스탭들이 아무리 훌륭했더라도 이동차는 좀 덜 썼더라면 어땠을까. 먼저 찍힌 시퀀스일수록 감독의 몸이 덜 풀린 듯한 어색함은, 천하의 변영주라도 어쩔 수 없이 데뷔작 만드는 신인 감독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연작을 한창 쏟아내던 당시의 변영주 감독이 자신의 다음 영화는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라는 제목을 가진 극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섬찟한 느낌에 얼이 빠져 있는 내게 “멋지지 않아요”라고 되물었더랬다. 제목은 달라도 이 영화 <밀애>는 탄환을 동경하던 한 여자의 심장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된다.김소희/ 영화평론가 cafe.daum.net/cw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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