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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의문들이 자의적 추리력을 부추기다,<하얀방>
2002-11-12

■ Story

방송사 PD 한수진은 사이버수사대 최진석을 취재하던 중 그가 다루는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마리 산부인과’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이 모두 죽었으며 그 희생자들처럼 한수진 역시 그 사이트에 접속한 뒤 하얀 방으로 인도되어 죽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사건을 조사하던 한수진과 최진석은 유실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그녀의 친구로부터 듣게 되고, 이 사건이 그녀와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한수진은 유실이 살던 1308호에 들어가게 되고, 최진석은 유실이 남긴 그림에서 범인을 찾아낸다.

■ Review

명석한 콜롬보처럼 말해보자. 동기와 결과를 놓고 맞춰볼 때 사건의 진상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다. 출세욕에 불타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과거에 그의 아이를 갖게 된 한 여자(유실)가 있다. 그러나 남자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아이는 출세를 가로막는 장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의 구타에 의해 유산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와 연인 사이로 지내고 있는 다른 여자(한수진)가 있다. 그녀 역시 이 남자의 아이를 갖게 된다. 남자는 역시 아이를 낙태시키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여자는 끝끝내 반대한다(그러나 이미 낙태를 한 이후이다). 결국 남자는 미치광이로 돌변한다. 당신이 바로 범인이군요!

하지만 미스터리에 빠져 헤매는 탐정처럼 말해보자. 동기와 결과 사이에는 하얗게 남아 있는 공백 또는 질문들이 있다. 유실은 마리 산부인과에서 유산을 했으며, 그 아이의 사체를 갖고 갔다. 그렇게 보인다(우리와 한수진은 이 사실을 마리 산부인과에서 근무했던 간호사에게 전해 듣는다). 왜냐하면, 한수진은 아이의 사체를 1308호 유실이 살던 집 욕실 천장에 마련되어 있는 인형의 방에서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이의 혼령을 위로한 뒤에도 공포는 사라질 줄 모른다. 만약 <하얀방>이 삶의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의 원한 맺힌 복수극이었다면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가 남아 있다. 굳이 말하자면 엄마가 먼저였다. 그렇다면, 아이의 엄마인 유실은 어떻게 된 걸까 죽은 걸까 사라진 걸까 우리는 잘 알지 못해도 죽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한수진이 다시 아이를 잉태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할 때 유실의 초상화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1308호 곳곳에서 이미 유령의 형상으로 떠돌아 다닌다. 그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원혼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작은 아이의 발이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 발은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소녀의 발이거나, 아이의 혼령을 대신하는 드레스 입은 인형의 발이거나, 엄마 유실의 드레스를 걸치고 있는 아이의 발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녀가 유실의 모습에서 연결되는 것은 당연해보일 수 있다(아마도 죽은 아기는 여자아이였나보다). <하얀방>은 낙태와 유산으로 인한 원한, 그 공포, 그리고 그 죗값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수진은 결국 아이를 낳는다. 그것이 정이석이 보는 환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한수진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녀가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이유를 우리는 그녀가 엄마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의미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는 설명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리 산부인과 사이트를 접속했던 희생자들은 낙태 결정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거나 아니면 낙태를 한 엄마들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그 벌로 죽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모두 임신한 상태로 죽게 된다. 그러나 또한 한결같이 희생자들을 아는 주변인물들은 그들이 임신한 사실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수진을 제외한 그녀들은 마리 산부인과 사이트를 접속할 이유들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주변인물들이 희생자들에 관해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이들의 희생은 이번 사건의 원인에 관계가 없는 것이다.

(왼쪽부터 차례로)♣ 검찰 사이버수사대를 다룬 특집 방송프로를 만드는 한수진과 이 수사대 형사 최진석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앞서거니뒤서거니 인터넷 사이트 `하얀방`의 실체에 접근한다. 그러나 더 먼저 사실에 다가서는 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한수진이다.♣ 한수진에게 하얀방의 공포가 현실로 나타나는 동안 최진석의 수사는 한참더디다. 그의 역할이 애매하게까지 느껴지다가 마지막 순간에 수진의 결정적인 조력자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최진석이 영화 속의 사건들에 대해 털어놓듯 우리는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진석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믿음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면, 우리는 설명되어 있는 것과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 사이의 혼란스러움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때 인물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우리가 뭔가 석연치 않다고 갸웃거리고 있을 때 인물들은 당연한 듯 행동한다. 말하자면 유실의 오피스텔에 들어선 장이석이 놀란 표정으로 여기 왜 있는 거냐며 한수진을 다그칠 때 우리는 모두 장이석과 유실의 관계를 알아챈다. 그러나 한수진은 모른다. 늘어난 한스 홀바인의 해골은 이때에 이미 정상적인 표식으로 드러났던 것인데도 말이다. 한편으론 한수진과 최진석이 어떻게 나이트 클럽에서 사건이 날지를 알고 미리 가게 됐는지를, 왜 마지막에 등장한 유실의 혼령이 최진석에게 술을 먹자고 하는 것인지를, 왜 한수진이 무작정 1308호에 들어가야만 하겠다고 했는지를 우리는 잘 모른다. <하얀방>은 그런 의문들을 남겨놓으며 우리를 끌고 다닌다. 어쩌면 설명되지 않고 생략되거나 겹쳐져 있는 의문부호들이 오히려 자의적 추리력을 부추기면서, 이 영화의 힘이 되고 있는 그 끔찍한 공포의 리듬을 더욱더 상승시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텔미썸딩, 텔미썸딩, 하면서 달려드는 유령들 또한 서성거리게 할 것이다. 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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