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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없는 폭력의 악순환,<해안선>
2002-11-19

■ Story

해안부대 소속인 강한철 상병(장동건)은 간첩을 잡겠다는 일념에 불타는 군인이다. 강 상병은 동료들과 상급자에게는 ‘고문관’ 소리를 들을지언정, 국가와 군 조직이 원하는 바를 120% 충족시키겠다는 생각의 소유자다. 어느 날 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를 본 그는 드르륵 소총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간첩인 줄만 알았던 시체의 주인공은 여자친구 미영(박지아)과 섹스를 하던 마을 청년 영길이었던 것. 강 상병은 민간인을 사살한 것에 충격을 받지만, 상부는 오히려 포상휴가를 내린다. 한편 눈앞에서 영길이 총에 맞는 모습을 본 미영은 정신이상이 돼 부대 병사들을 모두 영길로 착각하고, 부대원들은 그녀의 몸을 가진다. 부대에 복귀한 뒤에도 영길과 미영의 주변 인물에게 시달리며 자책감을 쌓아가던 강 상병은 마침내 미쳐버리고, 의가사 제대를 명령받는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철책 안으로 들어가 계속 간첩을 잡겠다며 동기생 김 상병(김정학)을 비롯한 부대원들과 충돌을 빚는다.

■ Review

강한철은 해안부대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 여자의 충실한 남자친구였고, 동료들의 즐거운 말벗이었을 것이다. 군에 입대한 뒤에도 민간인을 살해하기 전까지의 그는 남들보다 영웅심과 공명심이 강하다는 점 외엔 별 문제가 없는 한명의 군인이었다. 하지만 철책선 안에 마을 처녀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발을 들여놓은 순간, 강 상병의 삶은 일거에 무너진다. 곧 한 마을과 부대원들 모두 광기 속으로 빠져든다. <해안선>에 등장하는 각 집단과 개인들은 강 상병의 총구가 불을 뿜는 순간, 잘 세워놓은 도미노들이 순식간에 쓰러지듯 일제히 파멸이라는 운명을 향해 전진한다.

<해안선>에서 김기덕 감독은 이 ‘파멸의 도미노’가 남한과 북한을, 우리와 적을, 시민과 간첩을 갈라놓은 철책선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혈기왕성한 한쌍의 남녀의 침입으로 쉽사리 붕괴될 정도로 이 철책의 지반은 연약하며 경계 또한 모호하다. 이런 상황에서 철책의 이쪽과 저쪽의 소통을 인위적으로 가로막고, 억지로 통제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해에 불과하다는 것이 김기덕 감독의 논지다.

굳이 자세히 뜯어보지 않더라도 김기덕 감독의 여덟 번째 영화 <해안선>은 분명 전작들의 맥락 위에 놓여 있다. <악어>로 출발, <섬> <나쁜 남자>까지 그가 일관되게 보여주려 했던 ‘출구없는 폭력의 악순환’이나 ‘보이지 않는 구원에 대한 희망’ 등의 이야기는 <해안선>에서도 여지없이 관철된다. 여기에 분단으로부터 비롯된 모순까지 담아내려 한 이 영화는 전작들 중에서 <수취인불명>과 상당한 친화력을 갖고 있다. 특정한 공간에 붙잡힌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이나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잉조직된 이미지를 거듭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이 영화는 전형적인 김기덕 영화의 궤도를 따르는 듯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해안선>은 김기덕 영화의 종합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간인 오인사살이라는 외상(外傷)보다, 그것이 내면에 남긴 철책을 넘지 못해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강 상병은 사랑/관계라는 외상에 상처입은 <나쁜 남자>의 한기나 한국전쟁의 상흔이 뼛속까지 스며든 <수취인불명>의 개눈을 연상케 한다. <해안선>에 등장하는 물과 물고기의 이미지는 <섬>을, 군부대 주변의 황량한 풍경은 <수취인불명>을 떠올리게 하는 등, 이미지와 분위기면에서 또한 전작들과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왼쪽부터 차례로)♣ 강 상병(장동건)은 민간인 살해사건 전에는 그저 공명심 강한 한명의 군인이었다.♣ 철책선이 둘러쳐진 해안부대에서 복무하던 강 상병은 민간인을 간첩으로 오인사살한 뒤 급기야 서울 명동거리에서 총구를 겨누고 행인을 대검으로 난자하는 정신착란에 이른다.

동시에, <해안선>은 기존 김기덕 영화와 다른 낯선 요소를 갖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의 정치적 발언이다. 굳이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기원합니다’라는 후반부의 자막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분단이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여러 대목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또 하나, 잔혹하고 폭력적인 묘사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분단이라는 현실이 어떻게 한 인간의 내면에, 그리고 하나의 집단에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철조망을 세울 수 있는가를 매우 어둡고 격한 톤으로 밀어붙이면서 묘사하지만, 그동안 김기덕 영화를 거북스럽게 했던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은 절제된 느낌이다. 대신 미쳐버린 미영과 해안 부대 장병들의 거듭된 정사를 보여주는 데서처럼 은유적이고 암시적인 표현은 두드러지게 늘었다.

<해안선>은 김기덕 감독의 전환점 위에 서 있는 영화다. 하드보일드의 스피드와 서정성 및 판타지가 껄끄럽게 맞물리는 느낌을 주는 것 또한 변화의 한 징후일지 모른다. 물론 이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지루한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동어반복으로 여덟 발자국을 내딛는 동안, 어느새 그의 영화는 대중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 또한 김기덕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징조가 아닐까. 문석 ssoo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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