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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타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욕망의 파행적 행로, <리플리>
황혜림 2000-02-29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이기보다는 뛰어난 다른 누군가인 척하는 게 낫다-<리플리> 중”.

완벽할 수 없는 삶의 순간순간, 리플리와 같은 욕망을 느껴보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볼품없고 초라한 자기 연민의 늪 근처에도 가본 일 없노라 자신하기란 쉽지 않다. 마음먹은 대로 잘 풀리지 않는 삶의 무게는, 부족함 없어뵈는 비교항을 만나면 한결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햇빛 찬란한 이탈리아 해안에서 쾌락을 즐기는 디키를 만났을 때의 리플리처럼. 거울을 마주한 리플리의 탄식 같은 독백으로 문을 여는 <리플리>는, 나 아닌 타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욕망의 파행적 행로를 따라간다.

호텔에서 손님 시중드는 보이, 연회장의 피아노 연주자로 생활을 꾸려가는 리플리의 현실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디키의 동창 행세로 얻어낸 이탈리아행 티켓은, 상류사회의 삶을 갈망하는 리플리의 욕망에 뜻밖의 길을 열어준다. 리플리는 자신이 꿈꿔온 모든 것을 누리는 디키의 세계에 빠져들고, 그를 닮고자 한다. 디키가 좋아하는 재즈를 듣고, 그의 집에 머물고, 옷을 빌려 입고,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 하면서. 변변한 옷도, 돈도, 비싼 취미도 없는 동창이 별로 미덥지 않은 디키가 잘하는 게 뭐냐고 물을 때, “서명 위조하고, 거짓말하고, 사람 흉내내기”라고 답했던 그는 실제 디키의 모든 것을 닮아간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이고 싫증을 잘 내는 디키에게 리플리도 예외는 아니다. 재즈클럽에 같이 가고, 요트항해, 로마여행을 함께 즐기던 리플리에게 디키는 부담스럽다며 결별을 선언한다. 마지막 여행지에서 보트를 타면서 리플리는 조심스레 애정을 고백하지만 디키는 노골적으로 멸시할 뿐이다. 심한 싸움 끝에 리플리는 우발적으로 디키를 죽이고, 디키의 곁에서 그와 닮은 모습으로 사는 게 불가능해지자 그를 대신하기로 한다. 리플리는 디키 그린리프와 톰 리플리의 이중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아슬한 줄타기에 나서고, 허구 위에 쌓아올린 욕망은 끊임없는 거짓과 살인을 낳는다.

<리플리>는 감독인 앤서니 밍겔라를 필두로 촬영, 편집, 음악, 의상까지 아카데미를 휩쓸었던 <잉글리쉬 페이션트> 제작진의 작품. 왠지 낯익은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맞다. 르네 클레망 감독, 알랭 들롱 주연의 프랑스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로 영화화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이 원작인, 일종의 리메이크. 하지만 둘 중 하나를 봤대도 나머지 하나를 보는 재미가 크게 줄진 않는다. 신분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힌 젊은이의 위험한 줄타기를 그린 스릴러란 기본 구조는 비슷하나, <태양은 가득히>가 사회적 배경과 계급 갈등에 대한 풍자에 주목했다면, <리플리>는 인물의 내면으로 더 깊이 파고든 드라마다. 볼품없는 자신을 혐오하고 디키와 그의 삶을 숭배하는 리플리는 <태양은 가득히>에서보다 좀더 예민하고, 인간적이다.

스페인 계단이 있는 로마, 나폴리, 베니스 등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잡아낸 풍광은 50년대 풍 세트와 더불어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스타일을 만드는 데 제격인 무대. 짙푸른 지중해 해안, 작은 어촌들과 도시 사이로 흐르는 가브리엘 야레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욕망의 덫에 걸려 비극적 행로로 치닫는 리플리의 심리선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야레의 곡에 밍겔라가 가사를 붙이고, 여성 록가수 시네드 오코너가 부른 <카인을 위한 자장가>는 신비롭고 음울한 울림이 아름답다. 동생 아벨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을 탐내 동생을 살해한 형 카인은 물론 리플리에 대한 은유다. 그 밖에 디키와 리플리가 재즈클럽에서 부른 노래, 맷 데이먼이 부른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entine>, 또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같은 재즈 대가들의 곡까지 넘치는 음악과 낭만적인 영상의 조화, 드라마의 정교함은 특히 초반부에 마술적인 리듬을 갖는다. 이기적이고 자유분방한 디키 역에 적격인 주드 로, 다중적인 내면에 도전한 맷 데이먼의 연기도 볼 만하다.

원작소설에서 영화까지

선하고 불쌍해진 리플리씨

<리플리>의 원작은 원제와 제목이 같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씨>. 1955년 초판이 나온 이래 아직도 발행된다는 이 소설이 영화화한 것은 1960년 <태양은 가득히>에 이어 두 번째다. 소설의 주인공 톰 리플리는 20대 중반의 고아로, 절도와 남 흉내내기가 특기. <타임>에 따르면 원작의 리플리는, “양심의 가책과는 거리가 멀고, 필요할 땐 세련된 취향을 살릴 줄 아는 인물”이며 선하기보다는 악한 쪽이다. 또한 리플리의 살인은 완전범죄로 끝나고, 인과응보 대신 리플리의 성공으로 결론을 맺는다. 디키의 시체가 보트와 함께 발견되는 <태양은 가득히>, 욕망의 덫에 사랑을 희생시키는 <리플리>와는 사뭇 다르다. “정의에 대한 공공연한 열정은 지겹고 인위적이다. 인생이든 자연이든 정의가 행해지는지 아닌지 관심없긴 마찬가지”라는 하이스미스의 파격적 결말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독특한 재미를 줬다. 리플리는 영웅이 주인공인 시리즈가 대부분인 현실에서 보기 드물게 악당이 시리즈의 주인공. 그가 등장하는 소설은, <재능있는…>을 시작으로 <리플리 언더 그라운드>(1970), <리플리의 게임>(1974), <리플리를 쫓는 소년>(1980), <리플리 언더 워터>(1991) 등 5편이다.

21년생인 하이스미스는 미국 텍사스 출신. 히치콕이 51년경 영화로 만든 <기차 위의 이방인>(1950년)이 첫 소설이다. 곧이어 유럽으로 건너가 95년 타계하기까지 23편의 소설을 발표했으며, 미국보다 유럽에서 훨씬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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