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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하는 여정, <내 어머니의 모든 것>
홍성남(평론가) 2000-01-25

만일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오직 어머니만이 슬퍼할 것이다.”(롤랑 바르트) 망자(亡者)로 인해 삶의 궤도를 바꿀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여기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예외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이처럼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한 어머니, 그녀가 상실의 슬픔을 더욱 숭고하고 폭넓은 사랑으로 승화하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죽은 아들의 빈 자리를 메우려는 노력 속에서 타인에 대한 헌신을 실천하는 주인공 마뉴엘라의 이야기는 꽤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어느덧 50줄에 들어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역시 어머니의 원숙함을 체현한 탓일까? 그의 13번째 장편 영화인 이 작품이 이른바 알모도바르적이라 불리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에 일종의 평정(平靜)의 미학을 덧씌워주고 있는 것이. 예컨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알모도바르 특유의 알록달록한 야만적인 원색주의는 온색의 느낌이 가미되어 있고, 신경 쇠약 직전까지 간 여인들의 시끌벅적한 수다엔 삶의 결이 새겨져 있으며, 우연으로 점철된 그네들의 혼잡스런 소동엔 운명의 힘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변화의 양상은 알모도바르의 95년작 <비밀의 꽃>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다. 이 두 영화는 꽤 닮은 데가 있다. 가령 영화의 주인공들인, <비밀의 꽃>에서 로맨스소설 작가 레오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연극배우 출신 마뉴엘라는 남편들로부터 정상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고 어떤 식으로든 픽션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레오가 픽션을 통해 자신의 내밀한 정체성에 매달리는 반면, 마뉴엘라는 거의 맹목에 가까운 베풂을 통해 내적인 고통을 치유한다. 이런 차이점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알모도바르가 여성 주인공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또 어떤 식의 시선을 던지는지를 엿보게 한다.

아마도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가장 우스우면서 또한 콧날이 시큰할 만큼 감동적인 것은 여장 남자인 아그라도가 갑자기 연극 무대에 서서 ‘원 우먼 쇼’(?)를 하는 장면일 것이다. 관객에게 그녀는 자신이 여자의 몸으로 거듭나기 위해 얼마나 돈이 들어갔으며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 했는가를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런 비용은 아끼지 말라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조언이다. “돈이 들수록 그만큼 내가 꿈꾸는 나에게 가까워지거든요.” 아그라도의 이 말은 알모도바르가 펼치는 인공성에 대한 옹호론이자 여성성에 대한 매혹의 변이다.

확실히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그처럼 여성적인 것에 대해 매료된(‘여성의 감독’이란 별칭이 붙은) 한 남성 감독이 만든, 여성들에 대한, 여성들에게 바치는, 여성들의 영화라고 부를 만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남성들은 죽어버리거나(아들 에스테반), 치매 상태이거나(수녀 로사의 아버지), 또는 섹스광(연극 배우)이다. 반면 여성들은 마뉴엘라를 중심으로 자매들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여자보다 큰 가슴과 남성 생식기를 함께 갖고 있는 아그라도, 여장남자로부터 AIDS와 아기를 한꺼번에 선사받은 ‘수녀’ 로사, 까탈스런 레즈비언 연극 배우 위마. 도무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애정을 줄려야 줄 수 없는 이런 여인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마뉴엘라가 그 중심에 있다. 품 넓은 그녀의 모성애야말로 아마도 알모도바르가 갈구하는 여성성의 최대치처럼 보인다.

알모도바르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렇듯,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역시 탄생과 부활, 공유와 연대, 순환 등의 모티브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는, 제법 복잡한 구조를 숨기고 있는 영화다. 그럼에도 따뜻한 유머와 정서적인 감동을 엮어서 유연하게 스토리를 흘려보내는 재주는 이 영화를 아주 ‘쉬운’ 영화로 봐도 손색이 없게 만들어준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보면, 도저한 통찰력을 ‘과잉’의 멜로드라마로 포장하는 데에 알모도바르가 이미 어떤 경지에 올랐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알모도바르가 경의를 표하는 세명의 여배우

베티, 지나 그리고 로미

로미 슈나이더

베티 데이비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엔딩 크레딧에서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를 “배우를 연기한 모든 여자 연기자들과 여자가 된 남성들, 어머니가 되고 싶은 모든 사람들, 그리고 내 어머니”에게 바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크레딧의 맨 처음에는 어떻게든 자신과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세 여배우들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들이 바로 베티 데이비스, 지나 롤랜즈, 로미 슈나이더이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들이 출연한 영화들은 각각 조셉 L. 맨케비츠의 <이브의 모든 것>(1950),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1977),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중요한 것,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다>(1975)이다. 세 작품 모두 불행에 빠진 여배우를 다룬 영화들.

지나 롤랜즈

짙은 쌍꺼풀로 유명한 베티 데이비스가 출연한 <이브의 모든 것>은 브로드웨이의 빅 스타 마고가 배우 지망생인 젊은 여성 이브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뉴엘라와 위마의 친교의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모티브를 따왔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오프닝 나이트>는 미국 독립 영화의 지주 존 카사베츠가 감독하고 그의 부인인 지나 롤랜즈가 주연한 영화. 롤랜즈는 여기서 한계에 다다른 브로드웨이 배우를 연기했다. 그녀의 팬이 사고를 당해 죽는다는 설정이 알모도바르에게 영감을 준 듯. 오스트리아 태생의 로미 슈나이더는 프랑스를 비롯해 주로 유럽에서 활동한 여배우. <중요한 것,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다>에서 그녀는 나이는 들어가고 세파에 지친, 스타가 되기를 꿈꾸지만 싸구려 영화에나 출연하는 여배우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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