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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2001-10-09

■ Story

독일계 한국인 안나(김호정)는 완전한 망각을 소망한다. 다행히 <나비>의 무대인 가까운 미래의 서울엔 망각의 바이러스가 살고 있고, 망각 바이러스를 찾아 떠나는 패키지 여행상품까지 마련돼 있다. 독일에서 온 안나를 가이드 유키(강혜정)와 운전사 K(장현성)가 맞는다. 납중독자인 유키는 의사의 심각한 경고에도 7개월 된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 과거를 잃어버린 K는 기억을 찾아줄 친지를 찾고 있다. 망각의 바이러스를 나비가 인도하며, 나비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지독한 산성비가 내린다. 세 사람의 젖은 겨울옷 같은 여정이 시작되지만, 그들이 찾는 망각의 바이러스는 눈앞에서 자꾸만 사라진다. 대신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알아간다.

■ Review

자기의 영혼으로부터 유배되기를 청하는 여인이 있다. 그녀에게 국적이나 소속은 휴짓조각이며, 자아나 정체성 따위도 잘못 배달된 초대장일 뿐이다. 아마 그녀는 자살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살이 아니라면 남은 유일한 길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영혼으로 사는 것, 최악의 경우라도 허깨비처럼 사는 것이다. 기억상실증의 치유가 아닌 기억상실증에 의한 치유. 2001년의 세계에선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나비>의 무대인 근미래의 서울에선 가능하다.

1998년 <이방인>으로 데뷔한 문승욱 감독은 한 여인의 완전한 망각을 향한 음울한 여정을 두 번째 작품의 소재로 택했다. 데뷔작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여기는 문 감독에게 <나비>는 제 영혼마저 낯선 또다른 이방인을 주인공 삼아 새로 쓴 데뷔작이다. 시간과 공간은 넓고 깊은 경계를 넘었지만, 그리고 세상은 더 사납고 추워졌지만, 폴란드 거리를 텅 빈 얼굴로 배회하던 <이방인>의 남자는 낯선 모국의 뒷골목에 내팽개쳐진 <나비>의 여인, 그 작은 어깨 위에 고스란히 포개진다.

막이 열리면, 서울 하늘 아래 비행기 좌석에 구겨진 채 깊은 눈그림자를 드리운 여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나비>는 이 여인, 독일계 한국인 안나에 관해 많은 걸 말해주지 않는다. 아랫배에 길게 남은 수술자국과 아주 짧은 고백이 그녀가 언젠가 7개월된 태아를 잃었다는 걸 알려주지만, 그녀가 도피하려는 기억의 정체는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 <나비>는 그걸 궁금하게 하지 않는다. <나비>는 이를테면 카메라로 그린 여인의 초상이다. 이야기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떤 찰나의 포착이 영혼의 결을 일러주는 카메라의 능력을 신뢰하는 영화다. 비슷한 상처를 지녔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치유하려는 두 남녀와 안나의 동행을 <나비>의 카메라는 묵묵히 좇는다. 그렇게 <나비>는 상처와 싸우지 않고, 상처와 동행한다.

문승욱 감독이 필름 대신 택한 디지털카메라는 인물 다큐멘터리의 장점을 닮으려는 <나비>의 소망을 든든하게 지지한다. 인물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잠깐 스치는 표정의 일그러짐조차 놓치지 않는 집요한 카메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인물들의 이미지를 긴 잔상으로 남긴다. 안나가 말없이 비행기 좌석에 앉아 깊은 눈으로 서울 거리를 내려다보는 첫 장면에서부터, 물장난을 치며 처음으로 얼굴의 그늘을 지우고 환하게 웃거나, 파르르 떨며 샤워장 구석에 구겨지듯 웅크리고 있는 장면들의 둔중한 육체성을 그 순간의 카메라 아닌 어떤 다른 매체가 대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연극무대에서 오랜 숙련을 거친 김호정의 유례없이 깊은 눈매와 고요한 연기는 여배우가 미모와 관능을 치장하지 않고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음을 새삼스레 수긍케 한다.

<나비>는 SF적인 상상력이 동원됐지만 SF적인 세팅이 전무한 영화다. 2000년 서울과 부산의 모습 그대로 별다른 치장없이 온기없는 미래공간으로 옮겨진다. 미장센에 무심성의한 듯 보이는 이 처사는 기묘하게도, 어색한 장면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한국 대도시의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를 아주 경제적으로 전달한다. 때론 씻어내야 할 독으로, 양수처럼 부드러운 안식처로, 때론 고통스런 영적 세척제로 탈바꿈하는 물은 공간의 여백을 흐르며 이 미래도시가 벗어날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는 오염된 자궁 같은 곳임을 차츰 드러낸다.

그래도 희망이 있을까. 죽음이 동반된 고통스런 출산이 희망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씻김굿 같은 바닷가 출산장면을 대단원에 둔 <나비>의 결말은 어쩔 수 없이 계몽적이지만 구도적 경건함이 배어 있다. <나비>는 올해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고, 지난 8월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선 청동표범상(여우주연상)과 젊은 비평가상을 받는 기쁨을 누렸다. 허문영 moon8@hani.co.kr

▶ <개봉작> 나비

▶ 저예산 작가주의 SF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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