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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키키 브라더스
2001-10-23

와이키키 브라더스

■ Story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는 남성 4인조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불경기로 인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출장 밴드를 전전한다. 팀의 리더 성우는 고향에 오는 것이 탐탁지는 않지만 수안보의 와이키키 호텔에서 일자리를 얻어 팀원들과 귀향한다. 성우는 고교 시절 밴드를 하며 꿈을 나눴던 친구들과 재회하지만, 어느새 친구들은 찌든 생활인으로 변해 있다. 이 와중에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맴버 강수는 여자 문제로 정석과 다투고 약물에 취해 살다 팀을 떠난다. 밴드는 해체 위기에 놓이고, 성우는 첫사랑이었던 인희를 만나지만 선뜻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 Review

그들은 더이상 바다로 나아가지 못한다. 신나는 드럼소리에 맞추어 ‘컴 백’을 부르던 친구들은 고작 노래방 기계음에 몸을 실고 ‘세상만사 무슨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이라며 반체념조의 노래를 불러젖힌다. 한때는 대한민국의 비틀스를 꿈꾸던 친구들은 지금은 목욕탕에 들어온 너훈아를 보는 일이 최고의 연예인 접견이 돼버렸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음악이 좋아 딴따라의 길과 까까머리의 우정을 키우던 ‘충고 보이스’ 시절이 있었다.

70, 80년대를 조폭 판타지와 보수주의 회귀라는 칼질로 통과했던 <친구>와 달리 임순례 감독은 비슷하게 변질된 우정과 사그라지는 청춘의 꿈을 끌어안으면서도 군내나는 삶의 진물과 주변부 인물들에 대한 세세한 애정을 거둬들이지 못한다. 넷이면 넷, 셋이면 셋, 주변의 인물을 한 화면에 고르게 배치하고 각도조차 기교를 부릴 줄 모르는 카메라는 보통 사람들의 눈길처럼 묵묵히 맨 삶을 응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양기부족의 에너지로 자기 인생 하나 건사 못하고 빌빌거리는 주인공들투성이니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의당 한방의 감동과 재미를 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영화의 마지막, 초라한 바닷가 나이트클럽에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르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멀어질 때면 때론 처연하고 때론 좌충우돌의 유머를 뿌리던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린다.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게 당신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던가. 그 순간, 산다는 게 힘들어도 다시 사랑에 기댈 수밖에 없는 그 평범한 진리가 승화되는 슬픔의 고갱이로 몰려왔다.

대체 수안보와 와이키키의 간극은 얼마나 먼 것일까? 모두가 벌거벗고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룸살롱의 조악한 TV화면에는 금발의 늘씬한 백인남성들과 백인여성들이 해변의 망중한을 즐긴다. 고급한 위안의 장소로 와이키키는 대한민국 곳곳을 떠다니지만, 그곳에 손을 뻗칠수록 되돌아오는 것은 갈증나는 기호로 작동하는 부표 같은 유토피아의 이미지이다. 그 수안보와 와이키키의 간극이 멀어질수록 우리는 안다. 우리 역시 가짜가 되어간다는 것을. 너훈아도 이엉자도 남의 이름을 빌려 사는 ‘짜가’ 브라더스와 시스터스가 되어간다는 것을. 그 씁쓸하고도 퇴락해가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바로 희미한 노래방 불빛 아래 벌거벗고 기타를 치던 주인공의 퀭한 두눈의 암흑으로 압축된다. 이 장면은 잊기 힘든 잔상을 남긴다. 그가 감내하는 우리 사회의 폭압과 그가 놓지 못하는 질긴 꿈 때문에.

그러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이러한 고단한 현실에서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질문으로 관객에게 희미한 희망을 던지는 뱃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하나는 “하고 싶은 것 하고 사니 행복하니?”라는 친구의 질문. 다른 하나는 평상시에는 떡볶이 아줌마에서 가끔 가짜 이엉자로 변하는 아줌마 가수가 관객에게 날리는 질문. “가짜유? 싼맛에 보니 좋지 뭘 그래요?” ‘싸구려라도 좋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살겠다’는 억척과 능청은 스무살의 졸 듯 말 듯한 햇빛에 사그라졌던 이전의 임순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명실공히 올해 대한민국 영화계가 거둔 최고의 수확이다. 임순례는 응달에도 삶이 있음을, 각자의 꿈이 있었고 각자의 힘겨운 투쟁과 실패가 있었음을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그 상처를 위무하듯, 우리 모두가 아는 노래들을 풀어놓아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작은 뮤지컬로 만든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의 삶의 얼개를 거쳐 도출된 갸냘픈 희망과 동어반복의 체념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진정성의 개가인 것이다. 20대는 <봄날은 간다>를 보며 잊혀졌던 연애담에 훌쩍이겠지만, 이 땅의 부박한 삶의 한 조각이라도 맛본 이들은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뿜어내는 시린 현실과 유머를 외면하기 힘들 것이다. 진정한 한국적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이라고, 그 투박한 진심이 나를 울린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개봉작] 와이키키 브라더스

▶ <와이키키 브라더스> 뒷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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