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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죄와 벌
2001-12-27

■ Story 헬싱키의 도축장에서 일하는 라이카이넨(마르쿠 토이카)은 어느날 혼카넨이란 사람의 아파트에 들어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총으로 그를 쏴죽인다. 마침 그날은 혼카넨의 생일파티가 있을 예정이라 혼카넨의 아파트로 출장 요리를 나왔던 에바(아이노 세포)가 살인현장을 목격한다.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경찰은 목격자인 에바를 데려와 살인용의자인 라이카이넨과 대질시키지만 에바는 라이카이넨이 범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라이카이넨에게 자수할 것을 권고하는 에바. 경찰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지는 가운데 라이카이넨은 위조 여권을 만들어 외국으로 도주할 계획을 세운다.

■ Review

<히치콕과의 대화>라는 유명한 책에서 앨프리드 히치콕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문학의 고전을 영화화할 생각도 없으며 또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마 원작만큼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는데 자기로선 그것들을 영화언어로 적절하게 ‘번역’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가의 신중한 경구는 그 나중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감화를 주기도 하지만 때론 다분히 치기 섞인 반발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히치콕이 <죄와 벌>을 영화화하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구절을 읽고 난 영화감독 지망생이던 핀란드의 한 괴짜 청년은 후자쪽의 의견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내가 영화감독이 된다면 정말이지 <죄와 벌>부터 영화로 만들어보리라”는 식으로 다소 ‘오만한’ 생각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 그는 그런 자기 생각을 실천해버렸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장편 데뷔작인 <죄와 벌>은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현대의 헬싱키로 새롭게 옮겨놓은 영화다. 앞으로 영화 속에서 보여질 세상이 아주 잔인한 것임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영화는 참혹하다고 말할 만한 이미지들로 시작한다. 자그마한 벌레 한 마리가 그것에게는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만큼 큰 칼날에 의해 두 동강나는 숏에 이어 고깃덩어리들이 조각조각 잘려나가고 죽은 그것들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면들을 냉랭하게 바라보는 도축장 시퀀스는 웬만큼 비위가 좋지 않은 관객으로 하여금 아예 질끈 눈을 감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 무표정한 도살은 곧바로 주인공 라이카이넨이 저지르는 비정한 살인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영화는 이 세상의 흉포함은 이제 그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하는 듯 불쾌한 도륙의 스펙터클을 일찌감치 마감한다. 영화의 나머지 상당 부분은 살인자 라이카이넨이 그 흉악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내면적·외면적 몸부림으로 채워진다.

분명 나폴레옹이 사상 최대의 살인자였음에도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가 범인(凡人)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렇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범인과 달리 ‘비범인’(非凡人)은 법률과 도덕을 초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가 전당포 주인을 도끼로 ‘정당하게’ 살해한 것도 자신이 범인이 아닌 존재, 그래서 기생충과도 다름없는 악한을 처단할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카우리스마키의 주인공 라이카이넨도 아마 라스콜리니코프와 유사한 생각을 품은 캐릭터인 것으로 보인다.

라이카이넨이 혼카넨이란 자를 살해한 것은 피상적으로 보면 그 피살자가 3년 전 자동차로 자기 약혼녀를 치여죽인 데 대한 복수를 한 것이기도 하지만 라이카이넨의 마음속에서 살의는 그런 사적(私的)인 것에서보다 추상적인 것으로 바뀌어간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조롱해보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증거를 조작하며 경찰들을 우롱하는 비범함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처럼 ‘위험한’ 사고를 가진 라이카이넨은 이 사회 속에서 당연히 여러 장애물들에 직면한다. 제도의 대변인으로서 경찰은 ‘질서’를 어긴 그를 체포하려 하고, 살인사건의 목격자인 에바는 그로 하여금 양심에 따라서 스스로 자수하기를 권유하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세상에 제대로 반항하는 것이 가능한지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죄와 벌>은 자신 앞에 여러 겹의 장애물이 견고하게 둘러쳐진 막막한 세상에서 출구를 찾아보려는 라이카이넨의 (헛된) 고투의 기록이다.

하지만 영화감독 카우리스마키는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과 악의 경계에 놓여 있는 주인공의 내면을 포착하려고 시도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말들, 즉 독백과 대화와 사색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카우리스마키는 주인공의 복합적이고 또 모순적인 심리를 묘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비우는 방식을 택한다. 영화에서 라이카이넨의 내면은 결코 소설 속 캐릭터처럼 깊이있게 그려지지 않고 실제 인물을 보듯 그의 눈길, 표정, 몸짓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비쳐질 뿐이다. 이 점 때문에 카우리스마키의 <죄와 벌>은 어떤 면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근거한 이 영화를 브레송은 행위가 곧 성격화인 영화, 캐릭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영화, 이런 모호함 속에 세상의 미스터리를 가득 채워놓은 영화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사한 방법론을 채용했다고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브레송의 영화와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단순함과 공백은 종종 말 그대로 단순함과 공백 이상의 것으로 결코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다소 정제되지 않은 <죄와 벌>의 미니멀리즘은 짜증나게 하는 무책임과 고결한 감동 사이 그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 같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함께 상영하는 단편 <록키6> ... "스탤론에 바치는 허무개그"

자신의 어떤 영화에 대해 스스로 악평을 늘어놓기도 했던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의 89년작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두고 “실베스터 스탤론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영화사상 최악의 영화로 꼽힐 만한 작품”이라고 자평한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카우리스마키가 스탤론의 영화를 얼마나 우습게 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걸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으니 그게 바로 카우리스마키의 86년작 <록키6>(1986)이다.

아마도 실베스터 스탤론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히트작 <록키4>(1985)를 기억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스탤론이 베트남 땅에서 공산주의자를 쳐부수는 람보 역으로 인기를 끌 즈음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스탤론은 이건 거의 인간기계라고 할 만큼 가공할 소련 권투선수와 혈투 끝에 승리를 거둬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카우리스마키의 <록키6>는 바로 그 아둔한 영화에 대한 조롱을 담은 8분짜리 경쾌한 단편영화다.

<록키6>는 거대한 체구에 비해 지력은 전혀 발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소련 복서 이고르와 그와 시합을 갖기 위해 헬싱키를 찾은 록키 사이의 권투경기를 담았다. 스탤론의 영화에서라면 당연히 록키가 거구의 소련 선수를 제압할 것이지만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는 그 반대다. 앙상한 체구의 록키는 전혀 이고르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영화는 과장된 코미디 터치의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얻어맞고 또 얻어맞는 록키를(스탤론과 그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을) 조소한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스탤론이 어떻게 <록키5>(1990)를 만들 줄 알았는지 <록키4>에 대응해 나온 이 영화에 <록키6>라는 제목이 붙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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