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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저택 안으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디 아더스>

■ Story 1945년 영국 채널 제도의 져지섬. 늘 안개로 덮인 외진 곳의 저택에 젊은 부인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희귀병을 앓고 있는 두 아이 앤, 니콜라스와 함께 살고 있다. 햇빛에 닿으면 물집이 생기고 목숨까지 위험한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집안의 모든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어느날 하인들이 모두 떠나버린 저택에 밀즈 부인 일행이 찾아오고, 그레이스는 전에 이 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레이스는 꼭 지켜야 할 수칙을 알려준다. 방문을 열고 닫은 뒤 다른 문을 열기 전에 반드시 열쇠로 잠글 것, 등불 이외에는 다른 조명을 사용하지 말 것 등등. 그뒤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아무도 없는 이층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고,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피아노가 저절로 연주되기도 한다. 앤은 작은 남자아이와 무섭게 생긴 할머니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레이스는 믿으려 하지 않지만, 집안에서는 점점 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 Review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두 번째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가 할리우드에서 카메론 크로 감독, 톰 크루즈 주연의 <바닐라 스카이>로 리메이크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메나바르 감독은 관객을 매료시키는 재능이 있다. <롤링스톤>을 인용하자면, ‘그는 관객을 사로잡는 모든 방법을 알고 있다’. <떼시스>에서는 연쇄살인범,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는 가상현실의 미로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관객을 끌고 다닌다. 약간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영화 전체의 박력과 넘치는 기교가 작은 흠들은 충분히 가려준다. 아메나바르는 할리우드에서 충분히 탐낼 만한 감독이었다. 톰 크루즈 제작, 니콜 키드먼 주연의 첫 번째 할리우드 작품인 <디 아더스>는 전작들보다 훨씬 더 깔끔해지고, 섬세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자유자재로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디 아더스>의 어두운 저택 안으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감독이 이끄는 대로 여지없이 끌려다니는 것말고는 헤어날 방법이 없다.

영어로 만들어지고, 전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디 아더스>는 아메나바르에게 아주 중요한 영화였다. 할리우드 시스템에 편입해서도 자신의 호흡과 스텝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다양한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디 아더스>는 지난해 8월12일 북미에서 개봉되어 첫 주말에 1400만달러를 벌어들이고, 한달이 지난 9·11 테러 이후 모든 영화들이 13%에서 35%까지 관객이 감소할 때 오히려 11%가 증가하여 흥행순위 2위까지 치솟았다. 영국, 홍콩, 스페인, 호주 대만, 브라질 등에서도 1위를 차지했고 베니스영화제에서는 베네치아58부문에 선정되었다. <디 아더스>는 평단에서도 비교적 우호적인 평가를 받았고, 특히 니콜 키드먼의 히스테릭한 연기는 찬사를 받았다. 아메나바르의 할리우드 입성은 성공적이었다.

“공포물을 만든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게 우릴 두렵게 한다”는 아메나바르의 말대로 <디 아더스>의 공포는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레이스는 집안을 어둠으로 장식한다.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지만, 어쩐지 그 자체로 무덤 같은 형국이다. 그레이스는 강박적으로 어둠과 닫힌 공간에 집착한다. 그레이스의 행동 자체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면서, <디 아더스>의 공포는 시작된다. <디 아더스>가 던져주는 단서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혼자서 울리는 피아노, 눈앞에서 저절로 쾅하고 닫히는 문, 옆에서 속삭이는 말소리들. 하지만 <디 아더스>는 여느 공포영화처럼, 초자연적인 존재를 쫓는 것으로 바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관객을 혼란시킨다. ‘디 아더스’ 혹은 ‘인트루더’는 누구인가. 단순히 아이들의 장난인가, 밖에서 들어온 침입자(밀러 부인을 포함한)들의 음모인가, 아니면 정말로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위협인가. 아메나바르 감독은 반전에 이르기까지, 쉽게 결정적인 단서를 노출하지 않는다. ‘우아한 미니멀리즘’이란 말이 어울리게, 차근차근 공포를 쌓아나간다.

<디 아더스>는 고전적인 영화다. 니콜 키드먼은 흑백영화의 여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창백한 이미지를 선보이고, 의상도 지극히 단정하다. 주로 명암을 통해 표현되는 공포의 질감도 자극적이 아니라 차분하게 다가온다. 아메나바르 감독은 리버스 컷과 빠르게 움직이는 숏 등 고전적이고 익숙한 기교를 통해 두려움을 이끌어내고, 첼로의 불안함과 바이올린의 신경질적인 사운드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관객의 마음을 긁어댄다. 아메나바르는 존 카펜터와 다리오 아르젠토 이후, 공포영화의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감독의 하나다. 스플래터와 하드 고어에 익숙한 요즘 공포영화 팬에게 <디 아더스>는 한없이 느리지만, 그렇다고 공포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레이스가 엽총을 집어들고 저택의 좁고 긴 복도를 누빌 때, 마지막 장면에서 그레이스가 ‘디 아더’와 ‘대결’하는 순간의 긴장감은 어떤 엽기적인 공포영화의 ‘자극’도 능가한다.

아메나바르 감독이 <디 아더스>를 처음 구상한 것은 1998년의 일이다. 마드리드의 오래된 저택에서 머물고 있을 때, ‘미지의 어둠에서 뿜어나오는 두려움’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의도처럼, <디 아더스>의 주요한 공포는 ‘집’ 그 자체에서 나온다. 그 집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라는 의문과 두려움. <디 아더스>는 ‘집’에 주력하다가, 마지막 반전으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식스 센스>와 마찬가지로, <디 아더스>는 반전의 순간까지 끌고 가는 밀도 높은 긴장감 하나로 승부한다. 물론 반전은 뛰어나고, 그 과정도 훌륭하다. 그러나 ‘일관성’이라는 점에서, <디 아더스>는 <식스 센스>에 뒤처진다. 반전을 미리 말할 수는 없지만, 보고 나서 앞부분을 반추해보면 조금씩 어긋나는 것들이 보인다. 여전히 아메나바르는 한없이 뛰어난,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고 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귀신들 - 보이지 않는 적, 혹은 이웃

밀즈 부인의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들은 함께 살아간다”는 말처럼, ‘귀신’이라는 존재는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귀신의 체험담과 목격담은 구체적으로 전해진다. 그 이야기들은 이어서, 영화로 만들어진다.

<디 아더스>의 소재라고도 할 ‘귀신들린 집’은 공포영화의 단골소재다. 최근에도 나 <헌티드 힐>, 얀 드봉의 실패작 <더 헌팅>, 아미티빌 시리즈 등이 귀신들린 집의 공포를 그리고 있다. 집 즉 하나의 공간에 영혼이 머무르는 이유는, 그 장소에 뭔가 애착이나 원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죽은 뒤에도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자신의 갈망을 풀어줄 때까지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일종의 ‘에너지’ 혹은 ‘기억’으로서 죽은 자의 원한이 투사되어 이미지가 남게 되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단순히 장난치기 좋아하는 요정 폴터가이스트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는 말도 있고, 폴터가이스트 현상 자체가 불안정한 사춘기 아이들의 심적 상태에 조응한 자연현상이라는 설도 있다.

만약 귀신이 있다면, 죽은 자의 영혼이 이승에 남아 있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팀 버튼의 <비틀쥬스>에서 죽은 자는 저승에 자리가 생길 때까지 자신이 살던 집에 머물러야 한다.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른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결국 죽은 자들이 산 사람들과 한집에서 살아야 하고, 죽은 자들은 자신들의 휴식이 침범당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말썽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 그게 팀 버튼식 해석이다. <비틀쥬스>의 경우는 단지 기다림이 필요하기 때문이지만, 더 골치아픈 것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다. 놀라운 반전을 가져왔던 <식스 센스>의 브루스 윌리스는 결정적인 순간까지, 자신이 죽었음을 알지 못한다. 평소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오지 않았다면, 또는 아주 급작스러운 사고로 죽었을 때 죽은 자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 경우 귀신은 자신이 죽은 장소에서 떠돌거나, 자신이 평소에 해왔던 일을 계속 하려고 시도한다는 것. 또는 죽은 것은 알지만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머무르는 <사랑과 영혼> 같은 경우도 있다. 어쨌든 세상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산 사람들의 세계에 죽은 자가 끼어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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