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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나쁜남자
2002-01-08

시사실/나쁜 남자

■ Story

사창가의 깡패인 벙어리 한기(조재현)는 벤치에 앉아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던 여대생 선화(서원)를 보고 조심스레 다가가 옆자리에 앉아 보지만, 그녀로부터 싸늘하고 경멸적인 시선만을 받을 뿐이다. 한기는 남자친구를 만난 선화에게 달려들어 갑작스레 키스를 퍼붓다 지나던 군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다. 그는 모종의 계략을 꾸며 선화를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창가로 끌어들인다. 선화가 손님을 받는 창녀방 옆에 자리한 밀실에서 은밀하게 그녀가 몰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기는 점점 괴로워하게 된다. 한기의 부하 명수(최덕문)에게서 한기의 계략에 대해 알게 된 선화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명수를 이용해 사창가를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 Review

<수취인 불명>(2001)으로 비교적 고른 평가를 이끌어낸 김기덕은 좀더 사회적, 역사적인 공간 속으로 그의 캐릭터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안전한 행보를 계속 유지해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기덕은 그러한 기대를 아주 깨끗이 무시해버린다. 전작들을 통해 인물들을 둘러싼 공간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데 주력했던 김기덕은 이번엔 풍경을 상실한 인물들에 대한 매우 가혹한 초상화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단언컨대 <나쁜 남자>는 김기덕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영화일 뿐만 아니라 <수취인불명>을 넘어선 또 하나의 새로운 도약(혹은 비약)이다.

김기덕의 예전 영화들을 감싸고 있던 풍성한 물의 이미지가 자꾸 굳어가는 것과 비례하여 그만큼 그의 시선 또한 점점 심술궂어져 가는 것 같다. <나쁜 남자>에서 투명하지만 분명 가로막고 있는 것, 그러나 금세 깨어지는 것으로서의 유리는 <수취인불명>의 얼어붙은 눈보다도 더욱 저릿한 고통 속으로 인물들을 몰아넣는다. 인물들간의 관계는 육체에 새겨지는 고통과 상처를 (넘어서는 대신) 고스란히 품에 안고서야 비로소 성립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미처 마음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한기가 선화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는 최초의 파열의 순간을 보여준 영화는, 창녀방의 거울이 깨지고 선화와 한기가 다시 얼굴을 맞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야말로 숨가쁘게 따라간다. 화해의 악수는 청할지언정 구원을 향한 어떠한 초월적 지향도 절대 내비치지 않는 김기덕은 밀실에 앉아 라이터를 켜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 너머의 선화에게 보여주는 한기의 모습을 통해 아주 섬뜩한 성화(聖畵)를 그려낸다. 여기엔 체념이 아닌 방식으로, 어쩌면 증오를 통해 긍정되는 추악함의 현현이 있다.

사창가의 깡패 한기는 제목 그대로 ‘나쁜 남자’이지만 이러한 명명의 대립항으로 존재하는 것은 ‘착한 남자’도 혹은 ‘착한 여자’도 아니다. 전복과 위반의 즐거움은 선악의 경계를 나누고 이를 허물어뜨리는 데서 오는 것이지만 김기덕은 이런 식의 놀이에는 빠져들지 않는다. <나쁜 남자>에서 악은 그 대립항을 상실함으로써 사실상 명명 불가능한 것이 된다. 만일 그러한 대립항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 속물근성일 것이다. 에곤 실레의 누드화에 관심을 갖는 선화, 어떻게든 선화를 이끌고 여관으로 들어가려다 막상 그녀가 몸을 허락하자 이유를 캐묻는 선화의 애인, 선화가 창녀가 된 데 대해 자신의 책임 운운하며 속죄를 얻으려 하는 한기의 부하 명수의 행위는 차가운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보도자료에 실린 연출의 변, ‘너무 검어서 흰 것이 때처럼 느껴지는…’이라는 말은 이러한 해석하에서라면 아주 흥미로운 언급이 된다. 또한 한기의 계략에 속아 사창가로 끌려들어간 여대생 선화의 인생은 쉽사리 ‘타락’이라 규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쁜 남자>에서 육체의 더럽혀짐이나 고통 등은 모종의 상승이나 속죄 혹은 정화를 위한 과정으로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직적인 이동의 표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삶은 고통스럽더라도 감내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며 벗어버려야 할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더러워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나쁜 남자>가 관객과 평자들을 경악시키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김기덕은 가톨릭적인 강박관념을 정확하게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섬>(2000)의 마지막 부분을 연상시키는 <나쁜 남자>의 당혹스러운 결말은 김기덕의 영화에서 이제 환상마저도 도피가 되지 못하고 생의 더러움을 모방하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징표일 것이다.

김기덕의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나쁜 남자> 또한 세련된 모던 영화의 전략으로 관객의 입맛을 끌어당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영화이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아직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게 만든다(대신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보답한다). 하지만 위험한 작가주의와 센세이션 사이에서 벌이는 줄다리기는 김기덕을 다시 한번 우리의 품안에 안착시키려는 섣부른 시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선화가 바닷가에서 찾아낸 찢어진 사진을 두고 벌이는 운명의 퍼즐 맞추기가 식상한 것이라고 말하기 전에, 김기덕의 영화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잃어버린 조각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우리는 김기덕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꿰어맞춘 조각 사이, 그 텅 빈 구멍 위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왜 거울 너머로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보이는가?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김기덕 영화와 처음 조우하는 관객을 위해

낯익은, 그러나 낯선

한편의 영화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는 도중에 이미 다음 작품에 돌입하곤 하는 무서운 작업 속도와 최근 국제영화제에서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김기덕의 영화들은 아직 우리나라 관객에게 그저 제목만 들어서 알고 있는 작품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의 일곱 번째 영화 <나쁜 남자>를 통해 처음으로 김기덕의 세계에 들어가게 될 관객의 경우, 이 영화가 그동안의 세간의 상투적인 평가- 엽기적이다, 성적 학대로 가득하다, 비약과 작위성으로 넘쳐난다, 상징이 도식적이고 진부하다 등등의 하나마나한 말들- 를 수긍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인지 혹은 도전적으로 좀더 폭넓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인지가 사뭇 궁금하다.

극중의 사창가 거리 한편에 자리한 성도극장이라는 이름의 동시상영관에서는 3편의 영화가 상영중이다. <나쁜 남자> 또한 기꺼이 동시상영을 감행하면서 김기덕의 이전 영화들의 릴을 순서없이 번갈아가며 영사기에 걸어놓는다. 일단 조재현이 연기한 한기의 캐릭터에는 <악어>(1996)와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 그리고 <섬>(2000)에서 그가 맡아 연기한 인물들과 <파란 대문>(1998)에서의 진아 기둥서방의 모습이 한데 얽혀 있다. 한기에 의해 창녀가 되는 선화는 <섬>에서 희진의 질투에 의해 발목에 오토바이가 매달린 채 수장되었던 다방 레지로 출연한 바 있는 서원이 맡아 연기했다. 그외 <파란 대문>의 새장 여인숙과 포항의 바닷가가 다시 한번 등장하는가 하면, 몰래 선화의 행동거지를 지켜보는 한기의 모습은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핍쇼를 보던 홍산의 모습을 환기시킨다. 의외의 사물이 돌연히 흉기로 변하는 것까지도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단순한 반복이나 변주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김기덕은 스스로의 작품들을 다시 끌어들이면서도 거기에서 이질적인 화해와 낭만성, 판타지, 질투와 복수의 감정 등을 모조리 갈아내어 <나쁜 남자>를 좀더 섬뜩하게 벼려진 칼날처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감성적인 것을 통해 지성까지도 자극하는 <나쁜 남자>는 그 모든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진정 중요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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