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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블랙 호크 다운
2002-01-29

시사실/블랙 호크 다운

■ Story

1993년 10월3일. 내전과 기아에 허덕이는 소말리아에 파병된 미군 특공대와 델타포스는 난민을 위해 지원된 식량을 무기로 삼아 전쟁을 지속하는 군벌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의 각료를 납치해 날개를 꺾겠다는 작전에 착수한다. 그러나 민병대의 로켓추진유탄(RPG) 공격으로 블랙 호크 헬리콥터 두대가 20분 간격으로 격추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1시간 내에 완료될 예정이던 작전은 18시간의 악몽으로 변질된다. “변화를 만들고 싶다”는 이상을 품고 소말리아에 온 에버스만 하사(조시 하트넷)의 제4분대를 비롯해 작전에 가담한 특공대원과 델타팀은, 비록 주검조각일지라도 전우를 뒤에 남기지 않는다는 신념에 기대어 긴 밤을 버티고 새벽을 맞는다.

■ Review 거대한 산일수록 빛의 각도에 따라 많은 얼굴을 드러낸다. 전쟁은 부피와 무게의 육중함만큼이나 공략하는 전술과 진법도 여럿인 소재다. 일단 액션영화로 관객에게 육박해 들어가는 전쟁영화는 예외없이 극한상황에 몰린 군상의 앙상블 드라마이며 시대극의 면모를 갖는가 하면 종종 멜로드라마의 무늬를 떠올리기도 한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군 사상 최대인 19명의 전사자를 낸 소말리아 모가디슈 작전을 그린 <블랙 호크 다운>에도 몇 가지 길이 있었다. 하지만 한 이상주의자의 강렬한 각성이나 제3세계에 개입한 워싱턴의 딜레마를 파고들 수도 있었던 <블랙 호크 다운>은 가장 단순명쾌한 카드, ‘현대 전투의 해부’를 미션으로 골라잡았다.

함락이나 탈환이 아닌 납치를 목적으로 한 모가디슈 작전은 듣기에도 간단하다. 40명의 델타포스가 모가디슈 시내의 건물에 진입해 표적을 체포하는 동안 헬기로 투입된 특공대원 75명이 주변을 경계하면 퇴로조가 포로와 부상자를 험비(총좌가 부착된 수송차량)에 태워 부대로 귀환할 것. 예상 소요시간 60분 미만. 그러나 블랙 호크 헬기 2대가 소말리아 민병대의 소형 미사일에 잇따라 격추되면서 그날 미군의 운세도 곤두박질친다. 위풍당당하게 출격한 <블랙 호크 다운>은 이때부터 ‘퇴각에 관한 긴 필름’으로 둔갑하고 특수부대원들은 마치 심야의 우범지대에서 길을 잃은 대도시의 틴에이저들처럼 공황상태에 빠진다. 적절히 안배된 기승전결이 아닌 분망한 발단과 긴 내리막길. 결코 매끈한 스토리텔링의 맵시는 아니다. 그러나 상관없다. <블랙 호크 다운>에서 최대 드라마는 연쇄되는 교전 상황을 재연한 스토리보드 위에 있기 때문이다. 손댈 수 없이 꼬여버린 시가전에서 달리고 쏘고 엄호하고 지휘관과 커뮤니케이션하며 상황을 돌파하는 싸움의 양상 자체가 어느 순간 영화의 몸뚱이가 되는 <블랙 호크 다운>은, 내러티브 영화가 갖는 스펙트럼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저널리스트 마크 보든의 책을 <블랙 호크 다운>의 텍스트로 선택함으로써 정형화된 캐릭터 및 감상주의와 어느 정도 결별한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의 ‘보급력’과 리들리 스콧의 연출은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냈다. 미 국방부가 제공한 4대의 블랙 호크를 부리고 군 전문가에게 화면의 블로킹을 조언받으며 일급 파일럿과 특공대원을 스턴트로 기용하는 최상의 제작환경을 만난 리들리 스콧 감독은 “편집하듯” 일사천리로 모로코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그리고 마치 성가시기라도 한 듯 영웅과 역사, 프로파간다를 전장에서 내쫓아버렸다. 한편 폭파와 총격이 영웅의 어깨 너머로 펼쳐지는 병풍이 아니라 주역이자 전경으로 쓰인 <블랙 호크 다운>의 혼돈에는 줄거리와 지도가 있다. 리들리 스콧은 영화적 스펙터클이 우리의 감각에 대한 마구잡이 폭음과 화염의 테러만 뜻하는 게 아니라 이해와 판독의 재미도 줄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숱한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압한다.

반면 이처럼 특정한 시점에 입각해 표면적 상황을 재현하는 <블랙 호크 다운>의 노선은 불가피하게 영화적 시선의 ‘사각지대’를 낳았다. 뜻모를 고성을 지르며 격추된 미 파일럿에게 무리지어 달려드는 모가디슈 시민들은 얼굴없는 검은 파도처럼 보이며, 그들이 미군에 품은 강렬한 분노의 근원도 해명되지 않는다. 영화 말미의 자막 ‘소말리아인 사망자 1천여명’의 큰 부분을 차지할 소말리아 민간인들의 희생 규모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리들리 스콧의 오래된 테마인 명예와 고통의 극복은, 극적 연출을 최대한 억누른 <블랙 호크 다운>에도 여전히 잠복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강한 메시지를 타전하는 것은 전우애를 동어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비장한 대사들이 아니라 전투의 전체적 흐름과 형식의 생생함이다. 2시간20분 동안 중계된 전황은 결과적으로 미군의 ‘강함’과 프로페셔널리즘을 은연중에 웅변하고, 상황실 모니터와 헬기, 지상군의 시점을 교차하며 재현된 전투의 난맥상은 한 지역에 기반을 구축한 정치세력에 대한 무력 개입이 얼마나 감당못할 흉물스러운 결과를 빚는지 절감케 한다.

리들리 스콧이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 할리우드가 멀지 않은 과거의 전투로 발길을 돌림에 따라 전쟁영화는 점점 더 테크니컬한 측면의 탐구로 기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희곡이고 테렌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이 시(詩)라면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은 한편의 가차없는 보고서다. 차갑지만 통렬하고, 단조롭지만 도리없이 매혹적인. 김혜리 vermeer@hani.co.kr

<블랙 호크 다운>의 군인들

주연은 ‘전투’, 조연은 이들

꽤 낯익은 스타부터 철모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면 혼동할 만한 신인까지, <블랙 호크 다운>은 결코 한 병사에게 오랜 시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막사의 밤을 스케치하는 도입부부터 철저한 앙상블 드라마임을 명백히 하는 이 영화에서 그래도 감정의 흐름을 주도하는 캐릭터는 조시 하트넷이 분한 매트 에버스만 특공대 하사. “이곳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으로 가만히 지켜보거나 돕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 이상주의자 에버스만은 처음 분대장 임무를 맡은 작전에서 커다란 시험을 겪는다. 세심한 성격대로 끊임없이 대원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그는 <플래툰>의 크리스가 그랬듯 독백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에버스만에게 전투의 이치와 동료에 대한 질긴 애착을 들려주는 것은 델타포스 하사 후트 깁슨. <헐크>의 주연으로 내정된 호주 출신 에릭 바나가 연기했다. 이완 맥그리거는 행정업무에 매여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실전에 투입되는 그라임즈로 분했다. 원두커피 분쇄법을 설교하던 그는 오랜만에 출전하자마자 로켓포의 호된 공격을 받는다. 또다른 영국 배우 이언 브렘너는 <트레인스포팅>의 스퍼드 역을 똑 닮은 얼치기 병사 숀 넬슨으로 분해 객석의 웃음을 책임진다. 퇴로조를 이끄는 대니 맥나잇 중령 역의 톰 시즈모어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진주만>으로 낯익은 연기자로 “그가 없이 할리우드는 어떤 전쟁에도 개입하지 못한다”는 농담이 나돌 만큼 전쟁영화에서 돋보이는 배우다.

이 모든 정예대원들을 통솔한 윌리엄 개리슨 소장으로는 작가이자 감독이기도 한 샘 셰퍼드가 분해 자신의 대사와 신을 손수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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