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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가 번스의 전설
2001-03-14

“경기의 리듬은 삶의 리듬을 보여주죠.” 어둠 속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주너에게 수호천사처럼 다가온 베가 번스는 그렇게 말한다. 골프채를 잡는 법(그립)에서 삶의 태도를, 골프경기에서 삶의 리듬을 볼 수 있다고. 자신과의 싸움, 승부와 반전이 뒤얽힌 스포츠가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비유. “골프는 경기를 할 순 있지만 이길 수는 없는 게임”이라는 <베가 번스의 전설>은, 그린에서 승부를 펼치는 골퍼의 모습에 인생사의 리듬을 겹쳐놓고자 한 낯익은 비유법의 영화다.

빛바랜 흑백 신문기사 속의 주너가 색채와 함께 숨결을 얻어 살아나면서 플래시백한 이야기의 무대는 공황기의 사바나. 주너를 우상시하던 소년 하디의 후일담 내레이션으로 운을 뗀 드라마가 전모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피상적인 전투 장면, 망가진 주너의 모습을 짧게 훑고 지난 뒤부터는 고지식하게 골프 영웅의 재기담을 들려준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골프채와 함께 삶의 의지를 놓아버렸던 주너가 잃었던 스윙 감각을, 인생을 어떻게 되찾는가 하는 과정에는, 스칼렛만큼은 아니지만 당찬 남부 여인 아델과의 로맨스, 골프 시합의 접전, 그리고 베가 번스의 선(禪)적인 조언이 뒤섞여 있다.

자신의 스윙 감각을 되찾는 주너와 달리, 감독 로버트 레드퍼드는 <호스 위스퍼러>에서 좀 무뎌진 연출 감각을 다는 회복하지 못한 듯하다.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데뷔작 <보통 사람들>부터 <흐르는 강물처럼> <퀴즈쇼> 등 인간관계, 인간다움을 화두로 세련된 소품을 만들어온 그도 세월을 먹으며 안이해진 걸까. 번스는 ‘전설’처럼 신비롭기 위해선지 별다른 전사 없이 주너를 돕는 흑인 조연에 머무르고,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그의 어록은 현숙하되 좀 과한 느낌이다. 탁 트인 그린과 호수 위로 지는 노을 같은 자연처럼, 좀더 과묵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레드퍼드의 준작.

황혜림 기자 blaue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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