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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판 발바리의 일기, <생활의 발견>

강철수의 만화 <발바리의 일기>의 주인공 달호는 여자하고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매번 잘 안 풀린다. 이게 행운인가보다 하고 쫓아갔다가 쪽팔린 처지에 놓이거나, 잔머리를 굴리다가 뒤통수를 맞기 일쑤다.

<생활의 발견>은 거칠게 비유하면 ‘홍상수판 발바리의 일기’다. 경수는 달호보다 잘 생기기는 했지만 백수인 달호처럼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어딘가 조금 모자라 보인다. 여자는 좋아해서 처음 만난 선영을 쫓아 예정에도 없던 경주로 빠지는 것도 비슷하다. 달호의 줄무늬 티셔츠 대신 춘천 사는 선배에게서 얻은 빨간 티셔츠를 입고서 여자에게 기웃대지만 그것도 잘 안 풀린다. 명숙을 만난 날 밤에 함께 자면서 일이 잘 되나 싶더니, 명숙은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며 무섭게 대든다. 도회지 깍쟁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선영은 다를 것 같아 매달리지만 안정적인 가정의 유부녀인 선영에게는 자신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그런 경수를 보며 낄낄대는 재미는 <발바리의 일기>와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은 거기에 만족할 위인이 아니다. 경수를 관찰하면서 모방이라는 인간의 행동원칙 하나를 찾아낸다. 경수는 아는 사람의 말을 따라하더니 또 다른 사람의 몸짓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로 답습한다. 급기야 여자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사고와 행동방식도 남을 따라 한다. 모방의 범위가 커지면 개인의 독자성은 당연히 축소된다. <생활의 발견>에는 그걸 애처럽게 바라보는 대목이 있다.

선영의 남편을 직접 보고서 그제서야 장벽이 두터움을 알게 된 경수는 “같이 죽자”며 선영에게 안긴다. 전작 <오! 수정>에서 수정의 옷을 벗기지 못하고는 엉엉 우는 영수를 떠올리게 한다. 자기 삶에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크게 느껴져, 우는 아이의 심정으로 퇴행해버리는 나약한 모습이랄까. 하지만 그런 경수를 비추는 장면은 무척 짧다.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을 미리 알고 싶어할 때 찾아가는 게 점집이다. 경수는 선영과 점집에 간다. 점쟁이는 선영에게 지금 남편은 복덩어리며 경수는 관재수, 손재수에 몸에 칼댈 운까지 지녔다고 말한다. 경수는 자꾸만 무장해제된다. 그것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비과학적인 예언에 의해.

그래도 영화의 리듬은 경쾌하다. 멀리서 점쟁이를 째려보는 경수의 눈을 비출 때, 경수 개인의 이야기로 한정시켜서 보면 여자 쫓아갔다가 쪽팔림 당하는 달호가 떠올라 웃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상황 아래 종속변수로 전락해가는 개인을 떠올리면 마냥 웃기도 힘들다. 경수가 마지막에 찾아간 선영 집 대문은, 밑에서 위를 향해 약간 기울여 찍은 각도에 비까지 내리면서 뜻밖의 괴기스러움을 내뿜는다.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이라도 지닌 듯.

<생활의 발견>은 홍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서술 대상의 규모가 한층 작아졌다. 또 전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모호한 구석을 일부러 드러내 놓더니 이번에는 숨긴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건 <오! 수정>부터지만, <오! 수정>에 이번 영화까지 합쳐서 보면 그의 작업은 더 냉정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 수정>에서 인간들은 자기가 과거에 한 일까지도 자기 멋대로 왜곡해 기억하더니, 이번에는 사고와 행동조차 독창적으로 하지 못한다. 그의 영화에서 인간은 자꾸만 왜소해진다. 이제 홍상수의 인물들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에서처럼 추악할 정도로 이기적이지도 못하고, 야비함에 가까운 위선을 떨지도 못한다. 그 이기심과 위선에는 전형성의 환상을 깨려는 의지와 힘이 있었다. 이제 전형은 홍 감독의 적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 왜소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눈높이를 낮춘다. 그렇게 찾아내는 '생활의 발견'이 미덥지만, 하필이면 충분히 목소리를 높여도 될 만큼 자기 반성에 철저한 그가 자꾸 자세를 낮추는 게 안타깝다.

명장면 명대사의 발견

"저 위장술, 저걸 변용하자!"

춤추는 명숙 - 명숙이 경수를 처음 만난 날 무용학원 바닥에 경수와 그의 선배를 나란히 앉혀 놓고 음악도 없이 춤을 춘다. 어색한 상황이 경수 일행에겐 거북하지만 명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춘다. 이 기막힌 대조 속에 명숙의 푼수기가 읽히는 순간 관객의 실소는 폭소로 바뀐다. 홍 감독은 이 영화 촬영장소 헌팅을 갔다가 무용하는 여자를 만나 갑작스런 춤 공연의 관객이 된 적이 있다. 어색함이 이 영화만큼은 아니었지만 홍 감독에겐 호재였다. 예지원씨에게 춤연습을 하라고 일렀다. 상황이 웃긴데 춤마저 이상하면 완전히 만화가 돼버릴 것 같아서였다. 영화에서 예지원은 춤을 잘 췄고 그게 또다른 맥락의 웃음을 연출한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경수가 선영의 집 문 앞을 기웃거리다가 선영의 남편과 마주친다. 어떻게 오셨냐는 질문을 뒤로 하고 황급히 돌아나오면서 경수가 하는 말.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홍 감독은 이 장면에서 둘이 몸싸움을 벌이는 걸 생각했다. 그러나 촬영 당일 아침에 수년 전 부산의 나이트클럽에서 봤던 한 젊은 남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는 홀에서 영어로 크게 떠들더니, 화장실에서는 친구들과 한국말을 곧잘 했다. 재미동포처럼 보여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려는 저 위장술, 저걸 변용하자.

선영의 손부채질 - 경수는 선영을 오래 전에 만난 것 같은데 그때의 얼굴이 안 떠오른다. 선영이 손부채질을 하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건 김상경씨의 경험담이다. 김씨는 에서 옛날 여자친구를 만났다. 얼굴을 봐도 가물가물한데, 그 아이가 맞다는 확신을 준 건 손부채질이었다.

회전문의 뱀을 떠올리며 돌아서는 경수* 옛날에 한 공주의 몸을 감고 있던 뱀이 춘천 청평사 회전문 앞에서 천둥번개가 치자 공주를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설화를, 춘천 사는 선배가 경수에게 들려준다. 선영의 집을 네번째 찾아간 경수는 천둥이 치는 순간 그 뱀을 떠올리며 선영을 포기하고 돌아선다. 모방이라는 모티브로 영화를 꾸리기로 한 홍 감독은 경수의 동선을 쫓아 춘천과 경주에 얽힌 설화들을 뒤지다가 청평사 뱀 이야기를 보게 됐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할 보물이 거기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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