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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아이언 팜
2002-04-16

시사실/아이언팜

■ Story

사랑하는 여자를 찾아 한국과 한국말을 버리고 LA로 날아온 남자가 있다. 그는 뜨거운 모래(여기선 뜨거운 밥)에 손을 담그는 기수련법 철사장으로 실연의 아픔을 달래왔고, 그래서 영어 이름도 ‘아이언 팜’으로 지었다. 아이언 팜(차인표)은 택시기사 동석(박광정)의 도움으로 여자친구 지니(김윤진)를 한 술집에서 찾아내 청혼한다. 그러나 지니에겐 막강한 새 남자친구 애드머럴(찰리 천)이 있다. 돈, 비자, 사업수완 등 지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애드머럴이지만, 무데뽀 정신으로 무장한 아이언 팜은 굴하지 않는다.

■ Review <아이언 팜>은 그 제목처럼 낯선 영화다. LA 한복판에서 소림사의 기수련법을 갈고 닦는 황당무계한 주인공 아이언 팜을, 영화가 고스란히 닮아 있다. 혼성교배와 변칙(반칙)이 장르 트렌드가 된 이즈음의 극장가에 날아든 <아이언 팜>은 엉뚱하게도 할리우드 클래식 코미디에서 자양분을 얻었고, 그렇게 예스러운 코미디를 표방했다. 코미디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를 안고, 미국으로 영화 유학을 떠났던 육상효 감독은 정답에 가까운 결과물을 들고, 이제 돌아왔다.

<아이언 팜>은 특히 캐릭터에 방점을 찍은 코미디영화다. 캐릭터의 개성이 갈등을 부르고, 부조리한 상황을 만들고, 웃음을 자아낸다. 아이언 팜은 첫사랑의 순정, 그 무모한 열정의 화신이다. 여자친구와 언제 어디서 잤는지를 세세히 기록하고 추억하는 건 차라리 애교스럽다. 몸도 맘도 떠난 여자를 찾아내 결혼하고 말겠다며, 무작정 미국으로 날아왔다. 철사장과 콩글리시로는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면서도. 하긴, 그는 오프너로 따게 돼 있는 하이네켄의 병뚜껑을 기어이 맨손으로 비틀어 따고야 마는, 그런 인간이다.

아이언 팜의 여자친구 지니는 더 걸작이다. 본의 아니게 양다리를 걸쳤지만, 이 여자는 자기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하다. 자기한테 목숨걸었다고 애걸하는 남자에게 “니 목숨 그렇게 하찮냐”고 쏘아붙이고, 다 용서하겠다는 남자에게 “상처줘서 미안하지만, 니가 용서할 일이 아니”라고 응수한다. 자기 때문에 싸우는 남자들에게 월수금, 화목토로 요일을 나눠주고, 주일에는 그 둘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간다. 한국영화 속에서 사랑에 목숨걸고 상처받고 버림받는 쪽이 번번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돌아보면, 지니는 대단히 전복적인 캐릭터다.

조연 캐릭터의 활약도 만만치 않다. 지니의 현 남자친구인 애드머럴은 성공한 사업가답게 “연애도 비즈니스”라는 철학을 견지한다. 매너 좋고 샤프한 그는 단순 돌진형인 아이언 팜과 팽팽한 전선을 형성한다. “볼트와 너트는 사이즈만 맞으면 된다”면서 아이언 팜의 순정을 비웃던 택시 기사 동석도 본심을 드러낼수록 정이 가는 인물. 지니의 동료인 글로리아는 정 많고 참견 잘하고 다혈질인 히스패닉의 전형으로, 미국사회의 또 다른 마이너리티 그룹을 대변한다.

개성만발의 캐릭터를 모았다고 해서, 웃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언 팜>은 웃음의 타이밍과 상황의 아이러니를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아이언 팜이 구애하자, 지니가 싸늘히 거절한다. 이때 갑자기 애드머럴이 튀어나온다. 컷, 그게 아니지, 하면서. 애드머럴은 아이언 팜이 지니의 사촌인 줄 알고, 실연당한 그에게 여자친구 되찾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양다리 걸친 사실이 들통난 뒤, 지니가 바에서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울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카메라가 반 바퀴 돌아보이면, 지니는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귀여운 속임수들이다.

<아이언 팜>은 인공미와 잔재주를 걷어낸 대신 이야기에 대한 욕심을 꼭꼭 눌러 담은 영화다. 캐릭터로 상황으로 보여주는 걸로도 모자라서, 몽타주로 음악으로 로케이션으로 이야기를 한다. 아이언 팜과 애드머럴의 대결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후렴구식으로 몽타주가 따라붙어 그들의 전적을 정리한다. 아이언 팜의 눈에 비친 사막 도시 LA의 코리아 타운, 그 위에 겹쳐지는 한대수씨의 걸쭉한 노랫가락은 이방인의 애환, 바로 그 쓸쓸함의 이미지다.

그런데 그게 딜레마다. “낭비가 없는 영화”라는 누군가의 평을 뒤집어보면 <아이언 팜>은 “여백이 없는 영화”다. 하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찬찬히 전할 여유를 갖지 못한 것 같다. 아이언 팜이 애드머럴과의 대결에서 한풀 꺾이고, 다시 심기일전하는 중후반의 일련의 과정, 비자문제를 해결하고 사랑을 완성하는 승리의 순간에 큰 감동이 일지 않는다는 건 아쉽다. 남녀 주인공의 행복한 결합이라는 귀결을 품은 장르영화의 태생적인 구태의연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이언 팜>은 육상효 감독의 첫번째 영화고, 그는 ‘정통’이라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미학적 기교와 잔재주를 걷어낸 그의 우직한 연출은 다음 영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기존의 이미지를 뒤짚어, 변신을 꾀한 차인표의 열연에도 박수를 보낸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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