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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들> 한적한 골목 귀퉁이 작은 카페 안.
이화정 2018-10-24

한적한 골목 귀퉁이 작은 카페 안. 노트북을 펼쳐놓은 아름(김민희)은 상념에 빠져 있다. 아니, 카페 안 사람들의 말을 훔쳐 듣는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시차를 두고 카페에 들어온 사람들의 대화는 가지각색이다. 죽은 친구를 언급하며 책임을 추궁하는 여자(공민정)와 이에 반발하는 남자(안재홍), 극단에서 나와 오갈 데 없어 후배(서영화) 집에 얹혀살아보려는 남자(기주봉), 그리고 직접 글을 써보지만 잘 풀리지 않아 작가인 후배(김새벽)에게 같이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배우(정진영).

마주앉은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반응이 이어지는 카페 안의 작은 테이블들. 끊임없는 대화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잠깐의 휴지기를 주는 순간은, 이 다종다양한 인물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카페 바깥에 늘어선 화분들을 바라볼 때뿐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의 영희(김민희)가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던 배추꽃처럼, 이 영화의 화분 안 풀잎들도 화려하지 않다. 조금은 한심하고 나약한 자신을 반추하듯 인물들은 화분 안 풀잎에 잠깐의 눈길을 준다.

낮부터 밤까지의 반나절. 마치 협소한 연극 무대 위 상황극 같아 보이는 그들의 대화에 제동을 거는 것은 아름의 내면을 전달하는 내레이션이다. 아름은 그들을 마치 꾸짖듯이 나무라며 하루 종일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다. 아름의 표현대로라면 ‘저 죽을 것도 모르고’, 그래서 ‘저렇게 단정하고 예쁘게 있을 수 있는’ 이들의 행태를 몰래 염탐하며 아름은 일기도 글도 아닌 ‘그냥 무언가’를 끄적인다. 아름의 존재는 이 흩어진 군상을 엮는 영화 바깥의 화자같이 보인다. 66분의 짧은 러닝타임이 이렇게 말의 포화상태로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 작품. 홍상수 감독의 22번째 장편이자 흑백영화. <자유의 언덕>(2013)의 배경이기도 한 안국역 뒷골목에서 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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