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Review] 일단 뛰어!
2002-05-07

시사실/일단뛰어

■ Story

성환(송승헌), 우섭(권상우), 진원(김영준), 셋은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 수업이 끝나면 늘 어울려 다니는 그들에게 어느 날 밤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성환이 몰던 차에 묵직한 부대와 사람이 떨어진 것이다. 사람은 죽은 듯 보이고, 부대엔 달러가 가득하다. 세 친구는 의식이 없는 사람을 차에 싣고 어떻게 처리할지 궁리하는데 그러는 동안 이번엔 시체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들은 일단 돈을 성환의 집에 숨긴다. 한편 신참 형사 지형(이범수)은 한 사채업자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뒤 뺑소니 흔적을 발견한다. 수사가 진척되면서 지형은 세명의 고등학생이 이 사건에 연관됐음을 알게된다.

■ Review

그들은 돈벼락을 맞는다. 어느 날 갑자기 손에 쥔 21억원을 고등학생 세 친구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일단 뛰어>라는 제목 그대로 그들은 임자없는 그 돈을 들고 튄다. <일단 뛰어>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돈가방을 둘러싼 모험담이다. 대니 보일의 <쉘로우 그레이브>와 <트레인스포팅>,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 한국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 <피도 눈물도 없이> <정글쥬스> 등이 비슷한 맥락에 놓인 영화들. 90년대 이후 꽤 많은 젊은 감독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장르는 스피드와 유머와 테크닉의 실험무대처럼 보인다. 영상원 1기 졸업생이며 20대 데뷔하는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젊은’ 감독 조의석도 비슷한 야심의 소유자이다. 영화는 초반부에 그룹 퀸의 노래 <Don’t Stop Me Now>로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그들의 질주? 송승헌, 권상우, 김영준 같은 청춘스타들을 모아놓았다면 그런 기대를 해봄직하다.

류승완의 <피도 눈물도 없이>가 돈가방 이야기에 퇴물 건달의 정서를 겹쳐놓은 것처럼 조의석의 <일단 뛰어>도 순전히 ‘돈가방 이야기’만 하자는 쪽은 아니다. 단편 <판타트로피칼>부터 청춘영화에 주목한 감독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젊은이들을 등장시킨다. 미국에서 살다와 남들보다 2살 많은 부잣집 아들 성환, “이모”, “고모” 하며 호스트로 일하는 우섭, 자기가 만든 홈페이지에만 열정을 보이는 진원 등 세 친구는 선생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 21억원이 생겨도 당장 무엇을 하겠다는 현실적 목표를 떠올릴 수 없는 아이들, 그들은 학교에서도, 학교 바깥에서도 아웃사이더로 떠돈다. 설정만 놓고 보면 청춘의 한순간을, 그 빛과 어둠을 잡아보겠다는 감독의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게 돈가방이 생긴 다음부터 영화는 애초의 목표를 망각한다. 편리하게도 그들은 학교에 잘 가지 않는다(혹은 고등학생으로 나올 뚜렷한 이유가 없어진다). 청춘의 고민, 격정, 불안, 정열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20대 감독이 만들었음직한 톡톡 튀는 재치와 순발력이다. <라쇼몽>의 코믹버전이라고 할 만한 두 차례 증언 시퀀스나 연극배우 출신 정규수, 이문식 콤비의 분투는 웃음을 참기 힘든 대목이다.

<일단 뛰어>는 일종의 백일몽이다. 어느 날 갑자기 21억원이 굴러들어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스스로 물어보며 재미있는 상상을 펼쳐보는 것이다. 돈을 도난당한 자는 말썽을 우려해 쉬쉬하고, 돈을 훔친 도둑은 구사일생 몸만 구하고, 무지막지한 킬러가 돈의 행방을 추적하며, 엉뚱한 사건의 꼬리를 밟던 형사가 사태의 전모에 접근한다. 감독이 ‘일상의 판타지’라고 표현한 이런 영화의 매력은 사건이 꼬여가는 재미 또는 사건을 풀어가는 재미이다. <쉘로우 그레이브>가 우발적 사건을 눈덩이처럼 부풀려 비극(실은 블랙코미디)으로 치닫는다면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는 꼬여가는 사건을 희극의 극단으로 몰고간다. 그 과정에서 대니 보일이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이기심을 해부한 반면 가이 리치는 바보들의 난장판을 보며 킬킬거린다. <일단 뛰어>가 취하는 태도는 가이 리치에 가깝다. 함께 웃어보자는 그 제안은 일단 그럴듯해 보인다. 개에게 발길질당해 보름달에 처박히는 장면처럼 판타지의 힘이 드러나는 대목에선 잠시나마 일탈의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발랄한 에너지가 간헐적인 충격에 그친다는 사실은 못내 아쉽다. <일단 뛰어>가 제시하는 ‘일상의 판타지’는 통렬한 파괴의 쾌감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래도 <일단 뛰어>는 불편한 웃음을 만드는 영화는 아니다. 송승헌, 권상우, 김영준 등 주연을 맡은 세 배우는 아직 스크린이 어색한 연기자들이지만 캐릭터에 어울리는 행동으로 영화의 매력을 만들어간다. 코믹 연기로 낯익은 이범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선사하는 미소도 영화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데뷔작다운 야심이 드러나지 않아도 조의석 감독의 미래가 기대되다면 이런 부분이다. 사술이 앞서는 영화가 횡행하는 판국에 편법에 기대지 않는 자세는 높이 살 만하다. <일단 뛰어>는 ‘발견의 기쁨’을 주는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과 배우의 잠재력이 느껴지는 ‘젊은’ 혹은 ‘어린’ 영화이다. 남동철 namdong@hani.co.kr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