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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소림축구
2002-05-14

시사실/소림축구

■ Story

소림사 여섯 사제 가운데 다섯째인 씽씽(주성치)은 쿵후를 발전시킬 묘안을 고민하던 차에 황금발 명봉(오맹달)을 만난다. 오래 전 최고의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으나 다리가 부러진 뒤 부랑자 신세가 된 명봉은 씽씽의 발차기가 괴력을 발휘하는 걸 보고 축구팀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씽씽은 사형들을 찾아가 축구를 하자고 설득하지만 쿵후만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에 익숙해진 사형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씽씽을 외면한 뒤 사형들은 품에서 한장의 사진을 꺼내본다. 여섯이 함께 쿵후를 닦았던 지난날이 담긴 사진,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고 드디어 소림축구팀이 탄생한다.

■ Review 위대한 희극은 누추한 우리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추레한 행색에 손가락질하지 않으며 궁핍한 안주머니를 탓하지 않는다. 위대한 코미디 배우는 세상의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권력자의 구두를 닦기 위해 무릎 꿇고 닳고 닳아 구멍난 운동화를 신고 있는 순간에도, 당당하다. <모던 타임즈> <시티 라이트> 등 채플린의 걸작들이 그랬고 주성치와 그의 영화 <소림축구>가 그렇다. 가난과 비애가 약동하는 삶의 에너지로 돌변하는, 믿을 수 없는 환희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소림축구>에서 그 순간은 현실의 낙오자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를 때 찾아온다. 누가 그들의 가망없는 꿈에 재기의 의지를 불어넣는가? 아디다스 상표가 반쯤 떨어져나간 허름한 트레이닝복, 발가락이 튀어나오는 헌 운동화, 대책없는 낙관론을 펼치며 소림 쿵후 부활을 열망하는 청년, 주성치가 연기하는 씽씽은 한낮의 번화가에서 자신의 꿈을 피력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쿵후를 한다면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쓰러질 때도 우아한 공중돌기를 하고 장풍으로 주차를 시키는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꿈. 그러나 바쁜 세상은 그의 꿈을 믿지 않는다. 쓰레기 더미를 나르는 초라한 젊은이에겐 눈길조차 줄 리 만무하다. 이때, 등장하는 한 사내, 영원한 그의 짝패 오맹달이 연기하는 황금발 명봉, 왕년의 축구스타에서 거리의 부랑자로 전락한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정지상태에서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씽씽의 놀라운 발차기, 천지가 진동하는 충격 속에 명봉은 씽씽의 내공이 발휘될 기회를 발견한다. 바로 축구팀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씽씽을 필두로 소림사 여섯 제자가 명봉 앞에 등장하는 순간은 감동과 웃음이 교차하는 주성치식 코미디의 정수이다. 선글라스를 쓰고 바바리 코트를 휘날리면서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며 슬로로 다가오는 그들, 비록 코트 안쪽에 사각팬티에 러닝셔츠만 입은 망측한 옷차림이지만 결연한 의지는 하늘을 찌른다.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좌천되고 강등당한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인력이 작용한다. 소림사에서 쿵후를 배우던 시절 찍은 여섯 제자가 환히 웃는 사진 한장, 영원히 간직할 좋은 시절의 기억이 그들을 소림축구팀으로 뭉치게 만든다. <풀 몬티>의 실업자들처럼, <반칙왕>의 송강호처럼 사회의 패배자인 소림축구팀은 현실과 싸운다. 상대는 특수효과와 미국의 첨단의학이 만든 발명품이지만 중국적 전통에 뿌리박힌 판타지는 소림축구팀의 것이다.

여기서 주성치는 직접 사회를 고발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피운다. 그것은 잠시 뒤 화염이 되어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린다. 주성치에게 분노는 파괴가 아니라 창조의 힘이다. 가난과 핍박의 설움이 키운 공력으로 그들은 축구를 한다. 공은 벽을 뚫고 골대를 날려버린다. 어마어마하게 과장된 이런 제스처들은 단지 웃자고 설정한 행동이 아니며 단순한 특수효과가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 씽씽만이 아니라 주성치 자신이 진심으로 그런 세상을 꿈꿔왔다. <소림축구>에서 주성치의 킥은 그의 우상 이소룡이 일본군 장교를 향해 질렀던 발차기를 닮았다. 골키퍼를 맡은 넷째 사형의 옷차림이 아니라도 <소림축구>에는 이소룡에 대한 주성치의 존경심이 물씬 배어 있다.

이처럼 <소림축구>가 주는 또 하나의 감동은 주성치가 영화를 향해 바치는 애정고백에서 비롯된다. 명봉이 축구협회장의 구두를 닦을 때, 소림사 다섯 제자들이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나타날 때, <소림축구>는 <영웅본색>의 비장함에 위트를 덧붙인다. 거기다 씽씽과 마을 건달들의 대결장면에선 서부극의 결투장면이, 소림축구팀과 마을 건달팀의 축구시합에선 전쟁영화의 치열한 교전장면이 겹쳐져 배꼽을 잡게 한다. 그중에도 최고는 만두가게 아가씨를 향한 구애의 시퀀스이다. 정상적인 대화장면에서 갑자기 모든 등장인물이 뮤지컬의 댄스 대형으로 돌변하는 이 대목에 이르면 주성치를 ‘희극지왕’이라 불러 마땅한 이유를 누구나 발견할 것이다. 엄숙한 순간 기지를 발하고 차분해지려는 찰나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을 건네는 주성치식 코미디는 한마디로 예측불허다.

온갖 장르를 종횡무진 아우르는 재담과 익살의 달인 주성치는 그만의 사랑법 또한 갖고 있다. 해진 운동화에 미키마우스 스티커를 붙여 꿰매는 촌스럽고 어눌한 사랑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는 이의 마음을 찢어놓는다. 주성치에게 환상적인 로맨스는 그림 같은 집이나 예쁜 드레스 같은 걸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찢어진 운동화와 눈물 젖은 만두 정도면 된다. 충분하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주성치 영화의 매력이다. 전작 <희극지왕>에서 장백지가 폴짝 뛰어올라 주성치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싸안는 장면에서 보여지듯 주성치는 가난한 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주성치는 이소룡 같은 쿵후스타를 꿈꿔왔다. 영화 속 씽씽의 소망도 주성치와 다르지 않다. 결국 주성치는 이소룡과 전혀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홍콩의 마지막 쿵후스타가 됐다. 씽씽 역시 쿵후를 축구에 접목시켜 최강의 팀을 만든다. 그들의 바람이 이뤄진 것처럼 지금의 고통을 참고 이기면 좋은 일도 있을 거라고 <소림축구>는 전한다. 극장에서 멋진 미래를 찾을 순 없을지언정 유쾌한 영화는 볼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한다. 주성치가 이 영화에서 동료와 연인, 모든 낙심한 인물들에게 들려주는 한마디가 있다. 그건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이다. 부당한 좌천이 억울해도, 잘생긴 얼굴이 대머리로 망가져도, 비만으로 모든 의욕이 사라져도, 울퉁불퉁 부스럼이 생겨 고개 들기가 두려워도, 절대 꺾이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라”. 주성치의 이 말은 촌철살인의 대사도, 깨달음을 주는 화두도 아니지만 <소림축구>가 만드는 정서적 공감대로 오래 간직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오랫동안 잘살았습니다’라는 해묵은 해피엔딩이 주성치 영화의 새로운 경지로 돌변한다. 한참을 웃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흥을 억누를 수 없는 영화 <소림축구>는 분명 위대한 희극이다. 남동철 namd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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