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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특수효과 없이 마법을 보여주는 홍상수의 렌즈들 '소설가의 영화'

소설가 준희(이혜영)는 오랜 슬럼프에 빠져 현재 글을 쓰지 못하는 상태다. 어느 날 그녀는 한참이나 연락이 끊긴 후배를 찾아 서울 근교의 작은 책방에 들른다. 후배의 서점에서 잠시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서점 직원에게 수화를 배운다. 처음 배운 수화는 다소 생경하지만, 막상 그 뜻을 습득하니 의미가 잘 전달되는 것 같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준희는 근처의 전망대를 방문한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그곳에서 알고 지내던 영화감독 부부와 재회한다. 세 사람은 함께 타워 아래의 공원을 걷기로 한다. 하지만 막상 산책로에 도착하자 문제가 발생한다. 우연히 만난 영화배우 길수(김민희)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영화감독과 준희 사이에 언성이 높아진 것이다. 결국 부부는 떠나고 준희와 길수 두 사람만 남는다. 의외로 둘은 금세 친해진다. 이윽고 준희가 길수에게 함께 단편영화를 찍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급진전된다.

홍상수의 27번째 장편 <소설가의 영화>는 이전의 몇몇 작품들처럼 ‘흑백’으로 완성됐다. 러닝타임은 ‘92분’으로 전작들보다 다소 긴 편에 속한다. 하지만 전체 컷 수는 25개 정도로 적은 편이다. 영화 길이에 비해 간소화됐다.

홍상수의 작품은 매번 소개될 때마다 그의 전작과 비교되곤 한다. 서로 비슷한 부분이 없는지를 찾게 되고, 출연이 겹친 배우들도 살피게 된다. 언뜻 필모그래피의 경계가 흐려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홍상수 영화의 특징 중 하나다. 이번 영화에는 ‘메타 시네마’나 ‘메타 이야기’ 같은 단어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소설가란 배역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다, 인물들도 직접 영화를 찍는다. 어쩌면 예술로서 ‘시네마’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단연 핵심 키워드는 주인공의 직업이 알리는 바처럼 ‘말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나이’나 ‘시곗바늘’처럼 일부 대사들은 정확한 무언가를 지칭해 설명한다. 마치 안과 밖의 구분처럼 이 단어들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럼에도 대다수 대사들은 모호한 편이다. 특히 ‘예술’이나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이 그렇다. 대표적으로 준희와 선배 시인의 관계는 어쩐지 애매해 보인다. 그들은 매우 친밀한 사이지만, 이들이 실제로 내뱉는 말을 관객은 전부 믿지 못한다. 준희 스스로가 설명하듯, 평소에 ‘일상을 과장해서 드러내는 것’이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한편 대사로 전혀 설명되지 않는 사실도 존재한다. 분식점의 꼬마 이야기가 그렇다. 아이가 어떠한 이유로 그곳에서 그녀들을 쳐다보았는지, 관객은 끝내 알지 못한다. 물론 주인공의 짐작처럼 길수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내용을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영화 속 영화’도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길수의 남편이 작품에 출연했는지 아닌지를 끝까지 알 수 없다. 다만 관객은 영화 속의 단편에서, 그가 아닌 다른 나이 지긋한 여성배우만을 바라보게 된다.

이번 영화의 대사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화 자체’에 대한 언급이다. “나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짜여야 한다. 어떤 배우를 편안한 상태에 두고서,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무언가를 온전히 기록하는 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다.” 배우 이혜영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이러한 내용은 홍상수의 팬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만한 것을 담는다. 지금껏 우리가 반복해서 관람한 그의 작품 세부와 묘하게 겹쳐지는 것 같다. 만일 예술이 투명하게 예술가의 속내를 비추는 매개체라면, 홍상수의 영화가 정확히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세간의 공인된 평가’가 아니라 직접 느껴야만 하는 영화가 바로 <소설가의 영화>다. 대사를 곱씹으면서 찬찬히 감상하길 권한다.

CHECK POINT

홍상수의 영화들

홍상수의 무려 27번째 장편영화다. 지난 10년간 그는 총 15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대략 1년에 1편 이상이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이들을 세밀하게 구분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가 그의 작품 전체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반갑다. 대사로 아주 무심하게, 영화는 감독의 전작들을 꿰뚫어서 이야기한다.

1인5역의 감독

이번에 홍상수는 각본과 연출 그리고 촬영, 편집, 음악을 도맡았다. 이와 같은 일인다역의 제작방식이야말로 홍상수의 트레이드마크라 부를 수 있다. 특히 촬영과 음악은 투박해서 더 빛이 난다. 일부 흑백의 화면들은 강한 대비를 보여주고, 음악은 소소하고 단조롭기에 마음을 움직인다. 영화 속 영화 또한 감독이 직접 찍었다.

베를린의 영광

홍상수의 최근 영화 3편은 나란히 베를린국제영화제(이하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 <도망친 여자>(2020)는 제70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음곰상 감독상을 받았고, <인트로덕션>(2021)은 제71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 각본상을 탔다. <풀잎들>(2018)이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대된 것을 포함해서, 최근 10년간 홍상수의 영화 6편이 베를린영화제의 다양한 부문에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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