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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레인보우>로 충무로 데뷔한 안진우 감독
2002-05-29

“지루하지 않은 멜로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34살의 노총각, 안진우 감독은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큰 고생을 안 해본 듯한 순한 인상에, 말할 때 곧잘 웃는 모습이 위아래로 두루 대인관계가 좋을 것 같았다.

그의 데뷔작 <오버 더 레인보우>는 내용만 놓고 보면 무척 욕심 많은 판타지이다. 교통사고로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 진수(이정재)가 옆모습이 담긴 사진만 남은 과거의 사랑을 찾아가다가, 그게 지금 새로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과 동일인임을 알게 된다. 시간과 기억의 단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의 유일한 사랑, 그런 게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 실제 대상을 동시에 주인공에게 안겨준다. 남녀가 성격이나 계급, 세계관 등의 차이를 극복하고 만나는 고전적 멜로라기보다, <번지점프를 하다> 처럼 ‘솔 메이트’ 내지 ‘일대일의 영원한 사랑’의 존재를 확인해가는 여정이 주를 이루는 다분히 이념적인 멜로다. 인상적인 건 <오버 더 레인보우>가 그 내용만큼 욕심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의 사랑을 찾는 미스터리적인 구성을 따라가면서 진수에게 동화되다보면 이 영화의 결말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짜임새나 장르적 장치의 안배가 데뷔작답지 않게 안정돼 있기 때문이다.

안 감독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가 “아침 7시부터 밤 늦게까지 수업하고 숙제도 잔뜩 내는” 학교가 싫어서 1학년 때 자퇴했다. 검정고시로 대학가자는 생각이었으나, 친구의 권유로 안양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봉숭아 학당’ 같은 그곳의 수업이 너무 재밌어서 몰두하다가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재학 시절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 연출부로 참여했고, 졸업 뒤 <지상만가>와 <퇴마록> 조감독을 거쳤다.

기억이라는 모티브를 멜로에 끌어들인 계기는.

처음 아이디어는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찾아나선, 과거에 사랑한 여자가 바로 지금 사랑하는 여자였다”는 딱 한줄이었다. 방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떠오른 것이다. 이런 건 남들이 안 한 것 같았다. 그 한줄에 98년 처음 얘기가 오갔던 제작사 폴리비전이 오케이를 했고, <접속>의 시나리오를 쓴 조명주 작가를 끌어들여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막상 시나리오를 쓰자니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설정이 진부해 보였다. 형식과 내용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미스터리 형식을 집어넣었고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을 많이 참고했다. 관객이 결말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맨앞부터 맥거핀을 깔고 시작하는 것도 이 영화에서 빌려왔다.

<오버 더 레인보우> 노래에 대해 특별한 개인적 사연이 있나.

그런 건 아니고,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여자를 찾는다는 설정에 처음 붙은 디테일이 ‘무지개’이다. 졸업작품이 남자가 학창 시절에 무지개 머리띠를 했던 여자를 찾아다니는 얘기였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진수가 과거에 여자에게 ‘무지개’라는 별칭을 붙였던 것으로 꾸몄다. 여기서 더 발전해 진수의 직업이 기상캐스터가 됐고, 주제곡은 <오버 더 레인보우>가 됐다. 그 덕에 돈 많이 들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 국내 상영시 판권료가 1만달러에, 한번 변주할 때마다 악보사용로 5천달러씩 4번 합해서 모두 3만달러가 들어갔다.

멜로를 좋아하나.

솔직히 별로 안 좋아한다. 꼭 멜로라는 장르를 싫어한다기보다 지루한 영화를 안 좋아한다. 대부분의 멜로영화가 지루하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지루하지 않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기억이라는 모티브는 다분히 기능적인 역할에 그친다. 만약 진수가 찾던 과거의 사랑이 따로 존재하고, 그래서 현재의 사랑과 갈등하는 식이라면 어땠을까.

과거를 강조하면 미스터리의 비중이 커지고 현재를 강조하면 멜로가 커지는 구조였다. 어쨌든 현재의 진수와 연희(장진영)를 붙여야 하는데 과거를 강조하면 힘들어질 것 같았다. 미스터리는 가볍게 풀고 적절한 시점에서 현재의 이야기로 넘기는 방식을 택했다. 처음에는 <라쇼몽>처럼 기억을 화두로 한 장치들을 염두에 뒀다. 진수가 사랑한 여자가 누구냐를 놓고 진수 주변의 친구들의 엇갈린 기억이 혼재하는 상황 같은 게 시나리오에 있었는데, 모두 뺐다. 거기에 힘을 들일 영화가 아닌 것 같았다.

‘솔 메이트’ 또는 ‘영원히 하나뿐인 사랑’ 같은 개념을 믿는가.

내가 여자를 한번 만나면 오래 만난다. 34살 되도록 연애가 두번밖에 없었다. 또 비슷한 사람에게 끌린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들에게 보이면, “거기가 거기서 노는구나” 그런다. 내가 생각해도 비슷한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은 물론이고, 최근 유하나 허진호 감독 영화처럼 그런 사랑의 개념을 깨는 멜로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데.

홍상수나 허진호 감독 둘 다 개인적으로 많이 좋아한다. 실생활을 파헤쳐서 연애란 게 이렇게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비해 내 영화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분들 영화는 처음에는 신선하지만, 자꾸 하니까 이것도 한 전형이구나 싶어지기도 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를 하자고 생각했다. 사랑이 이런 거라고 잘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어떤 남다른 함의나 메세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둘이 친해져가는 과정을 사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부럽다. 나는 상업영화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 같은 구속감이 있다. 내 성향 자체가 소수가 좋아하는 영화보다 다수가 극장에서 즐겁게 보는 걸 만들고 싶어한다.

연희가 진수에게 “기상예보는 내일에 대해 말하는 건데 좀더 밝게 하면 좋지 않냐”고 말하는 대사가 신선하다. 실제로 기상캐스터들을 취재했는가.

그 대사는 그냥 썼지만 기상예보나 기상캐스터의 생활에 대해 취재는 했다. 기상뉴스 전문 케이블의 오연택 캐스터 집에 연출부 사람 두명이 가서 3박4일 동안 살다시피 했다. 기상청에서 시사회를 했을 때, 기상청 직원들이 사고난 진수의 차에서 꺼낸 기상관련 책들을 보고 폭소를 떠뜨렸다. 그 책들이 진짜로 거기 직원들이 제일 자주 보는 것이었다. 실제 기상관련 직업종사자의 생활과 다른 대목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진수가 연희에게 “기상캐스터란 직업 한가해”라고 말하는 걸 두고 자신들은 절대로 한가하지 않다는 거였다. 물론 이 대사의 실제 뜻은 진수가 연희에게 호감을 전하려는 것이지만. 어쨌든 시사회 끝나고 기상청장이 이정재씨를 기상청 홍보대사로 임명했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키스는 물론이고 포옹장면도 안 나온다.

진수가 연희한테 키스하려다 못하는 장면을 두고, 연출부원들은 빼자고 난리였다. 우리 영화는 동화처럼 가야 한다, 그런 거 필요없다 등등. 하지만 이 대목은 둘의 관계가 다른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했다. 이것 빼고 육체적 접촉은 불필요한 것 같았다. 포옹이나 키스를 하기 전까지의 과정, 저 애가 날 진짜 좋아하나 불안해하는 것 등등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채팅하다가 번개로 만나서 바로 맺어지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 못하고 끙끙대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나도 고등학교 때 그랬다. 남녀 합반에서 좋아하는 여자에게 말도 못 걸고, 물론 나중에는 사귀었다가 헤어졌지만.

현장에서 배우들과의 호흡은.

이정재씨는 작품 수가 이번이 12번째다. 현장을 잘 알면서도 이러자, 저러자 하지 않고 내가 하는 걸 지켜보며 편하게 해주더라. 또 본인이 편집 포인트를 잘 안다. 컷이 바뀔 때마다 큰 동작을 하나씩 넣어준다. 처음에는 우연히 저러나 했는데 보니까 다 계산된 것이었다. 장진영씨는 똑똑한 배우다. 감성지수가 높은 것 같다. 관객이 어떤 걸 원할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울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내가 모니터 앞에 배우를 불러오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데, 장씨는 오자마자 “이거죠”라고 자기가 집어내서는 다음 찍을 때 바로 바꾼다. 그리고 공형진씨는 대학 동기다. 우정출연해서 너무 많이 웃겼다. 과거 회상장면에서 자꾸 웃기면 이상할 것 같아 편집할 때 아깝지만 잘라냈다. 그 친구는 죽을 때까지도 자기의 끼를 다 못 풀 것 같다.

콘티북이 두껍기로 유명하던데.

콘티를 많이 만들어놓고 찍는 게 좋다. 시나리오에서는 뭐가 불필요한지 안 보이는데, 콘티를 만들어놓으면 보인다. 이번 영화에서도 콘티 짜놓고 안 찍은 게 20신쯤 된다. 또 콘티에는 24컷짜리를 현장에서 한컷으로 간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콘티에는 한컷인 걸 현장에서 쪼개는 건 어렵다. 이렇게 하면 부대효과도 있다. 스탭들에게 3신 찍는다고 해놓고 현장에서 10신으로 늘리면 싫어한다. 반대로 하면 좋아한다.

앞으로 멜로 또 찍을 생각은.

할 얘기를 다해서, 더 할 게 지금은 없다. 가슴에 남았던 기억, 내 인생의 명장면들의 느낌이 이번에 다 들어간 것 같다. 다시 멜로를 하려면 (연애를) 더 해봐야 할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장에서 일이 너무 안 풀릴 때가 서너번 있었다. 배우들과 여러 번 의논하고 다시 찍고 해도 잘 안 되는 거였다. 다음날 하자고 프로듀서에게 말하면, 종합촬영소 일정 때문에 몇주가 늦어지고 그러면 개봉일도 미뤄진다는 거였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 찍었다. 그중 어떤 건 나중에 극장에서 보니 죽고 싶었다.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또 현장에서는 몰랐는데 뒤에 보니까 허술한 부분도 보였다. 공부를 한참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다음 영화는.

쓰고 있는 누아르 시나리오가 있는데, 등장인물이 많고 여러 명의 스타가 받쳐줘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음에는 못하고, 당장은 돈 버는 영화 해야 할 것 같다. 기획냄새가 나고, 그러면서도 완성도 있는 영화. 하나 정도 그런 게 있어야 계속 영화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 그래야 편하게 작업할 것 같다. 글 임범 isman@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