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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상위 위원장 사퇴하고 <오아시스> 개봉 앞둔 명계남
2002-06-05

˝제목은 ‘세원아, 2억원 빌려줘’로 뽑아줘˝

명계남(50) 이스트필름 대표는 항상 바쁘다. 부산영상위원회 위원장으로 신문 문화면의 고객인가 싶더니, 몇달 전부터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대표로 정치면 단골손님이 됐다. 지난 5월14일 그가 갑자기 부산영상위원회 위원장직을 사퇴했을 때 정치적 외압설도 돌았다. 그 사정이 궁금했지만 명 대표는 “특별히 말할 게 없다”며 대신 앞으로 만들 영화의 리스트를 줄줄이 열거했다. 제작자로서의 의욕이 보이기도 했지만, 뭔가 답답한 일이 많은 듯했다. 5일 전부터 담배를 끊었다고 해놓고, 인터뷰하는 한 시간 동안 금연초를 6대나 피웠다.

명 대표는 호불호를 감추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할말을 못 참는 성질이 종종 그를 지사로 보이게 한다. 99년 초 그가 제작한 <박하사탕>이 서울 단성사에, <거짓말>이 피카디리극장에 마주보며 걸려 손님들이 <거짓말>쪽에 몰릴 때 그는 피카디리극장 앞에서 방송 카메라에 대고 <거짓말>은 포르노가 아니라며 <거짓말> 옹호론을 외쳤다. ‘안티조선 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얼마 전 <오아시스> 촬영현장에 취재온 <조선일보> 기자에게 “가라”고 했다. 옆에 있던 이창동 감독이 그를 보며 “참 독한 양반이네”라고 했다. 인터뷰할 때, 영화제작과 관련된 이야기를 차분하게 하다가도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물으면 그 기질이 살아 목소리가 격앙되는 건 그로서는 불가항력인 것 같았다.

어떤 영화들을 제작하려고 하는지.

이스트필름은 이창동 영화만 해왔고, 그렇게 알려져 있다. 이창동 영화 만들고 싶어서 제작자가 됐지만, 이창동은 자기 영화에 프로듀서의 역할도 다 하니까 내가 일을 더해야 할 것도 같고…. 또 영화가 다양한 거고, 회사가 운영돼야 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영화도 할 필요가 있다. 개발중인 영화가 몇개 있다. 우선 방송작가 김운경이 각색한 황석영의 초기 장편(掌篇) <몰개월의 새>이다. <낙타누깔> 등과 함께 베트남전 3부작의 하나이다. 윤인호 감독과 만들기로 하고 지금 헌팅 겸해서 윤 감독과 김운경이 시나리오 수정하고 있다. 배우 방은진의 데뷔작을 제작하기로 했는데 원래는 마르시아스 심의 소설 <떨림>이었다. 얼마 전 방은진이 직접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 <위풍당당, 이유>로 바꿨다. ‘이유’는 여주인공 이름으로, 이혼에 관한 영화다. 90년대 초반에 <결혼이야기>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이혼이야기>이다. 이혼한 얘기, 이혼하려는 얘기 등등.

<몰개월의 새>는 나온 지 4반세기가 지났지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베트남에 가기 직전 실전 훈련을 받던 해병대 사병이 부대 인근 술집 여자의 촌스런 애정표현을 외면하다가 나중에 “세상에 유치한 것이란 없다”고 회상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깊었다. 어떻게 기획이 됐나.

김운경과는 그가 쓴 TV드라마 <파랑새>에 내가 출연한 게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그때 그가 나를 잘 몰라서 내가 맡은 캐릭터를 중도하차시켰다. 자기가 배우를 잘 모르면 캐릭터 구상이 잘 안 된다고 하더라. 뒤에 김운경이 윤인호 감독을 자주 만났고, 그때 <몰개월의 새>를 영화 만들자, 누가 좋을까, 불쌍한 명계남 돕자, 뭐 그런 말이 오갔던 모양이다. 김운경은 이 소설이 황석영 문학의 정수라고 했다. 베트남 파병전의 해병대 훈련장면 같은 건 그것대로 재밌는 양념이 될 것이고, <삼포가는 길>의 백화처럼 작부의 인생 같은 것도 있다. 또 부대 주변 마을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인데 이건 김 작가가 특기를 가진 분야다. 물건이 나올 것 같다. 그런데 돈 벌어야 하는데…. 김씨도 이 작품 제안할 때 명계남씨 돈 벌어야 하지 않냐고 말했다. 황석영씨는 예전부터 조금 안다. 자주 보진 않았지만. 영화 만들겠다고 하니까 그도 좋다 그랬고, 다른 것도 많으니 같이 영화 만들자고 했다. 나는 <손님> 하자고 했더니 그걸 중국 감독이 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그는 <장길산> 하라는데, 그게 한번 영화화하려다 엎어져서 저작권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고….

또 다른 아이템들은.

박흥식 감독 다음 작품을 내년에 들어가려 한다. 제목은 <인어공주>로 사랑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에 <시월애>처럼 엇갈린 시공간이 교차하기도 하고, 구성이 재밌다. 또 하나, 다른 제작자가 건네준 아이템인데, <고대앞 하숙집을 아시나요>이다. 30대 여자가 병원에서 죽기 전에 10살짜리 딸을 부른다. “네 아빠는 죽은 게 아니란다” 하며 사진을 보여준다. 여자가 시골에서 올라와 고려대 앞 하숙집에서 식모일할 때 하숙생 남자 7∼8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중 한명을 지목하기 직전에 그녀가 죽는다. 10살짜리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하숙집에 갔다가 옛날 주인 할머니의 손자인 망나니 ‘유오성’(스타 캐스팅의 희망이 담긴 명 대표의 표현)을 만난다. 유오성은 꼬마애가 내민 사진 속의 남자들이 지금 판사, 의사 등등 지도층 인사가 돼 있음을 알고 돈 벌 목적으로 꼬마와 합류한다. 그뒤에는 아버지를 찾을지, 로드무비가 될지, 가족의 의미를 발견할지 지금 작가 그룹에 맡겨서 개발중이다.

자금사정은 좋은가.

지금 빚이 4억∼5억원쯤 된다. 두세달에 한번쯤 위기가 온다. 지금처럼 일이 떨어지면 그때 힘들다. 그러다가 <조폭 마누라> 출연하면 메워지는데. 얼마 받았냐고? 톰 크루즈의 1300분의 1쯤. 1500만원 받았다. 요새는 출연교섭도 안 들어온다. 심재명처럼 솔직히 연기가 안 된다고 말하면 좋겠다. 괜히 딴소리들 해대니 얄밉다. 바쁘실 것 같아서, 돈을 많이 달라고 하실 것 같아서 등등. 한 2억원 빌리면 서너명 감독에게 안정적으로 작품 개발할 수 있게 할 텐데. 서세원한테 꿔볼까. 그거 좋겠다. 이 인터뷰 기사 제목으로 뽑으면 어떨까. “세원아, 2억원 빌려줘.” 다른 비슷한 처지의 제작사 몇곳과 합병하자는 제안도 했다. 내 기득권 다 버리겠다. 합치자. 그러면 경비도 줄고 효율도 올라가지 않을까.

<오아시스> 촬영이 다 끝나고 8월 초 개봉을 앞두고 있다. 흥행 전망은.

이창동의 영화는 제작자보다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이 더 든다. 촬영장 가보니까 내 생각에는 가슴을 찌릿하게 하는, 짠한 사랑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흥행? 투자자가 손해보지 않았으면 하는데. 설경구가 스타가 돼서 관객의 관심이 더 크지 않을까 싶고. 영화라는 게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데, 나도 인터넷에다가 적극적으로 살려달라고 할 거다. 이런 종류의 사랑 이야기는 처음 아닌가.

부산영상위원회 위원장직을 그만둔 사정은.

내가 그만둬도 부산영상위원회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영화뿐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지방화가 내실있게 진행돼야 하고, 부산은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부산토착자본 끌어들여서 그곳에 영화를 산업으로 정착시킬 수 있다. 부산영상위원회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됐다. 특별히 할말은 없고. 답답한 건 정치적인 상황이 여러 가지를 지배하는 풍토다. 정치와 관련되면 그걸 기준으로 다 판별한다. 사실이 아니어도 그걸 기준으로 사물을 보고, 그런게 서글프긴 하다.

흥행 신경써야 하는 영화제작자로서 ‘안티조선운동’ 하기가 힘들지 않나.

저번에 안티조선운동에 영화인들 서명할 때 제작자 등 사업이나 비즈니스에 관계된 사람들은 뺐다. 나는 그것도 우스웠지만. 그때 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취재 거부하고 보도자료 안 보내고. 그뒤 아직 영화를 안 만들어서 모르겠지만, 안티조선운동을 한다고 해서 사업적인 영역과 부닥치지 않는다. 또 그런다고 해도 굴하지도 않을 것이고.

‘노사모’ 대표라는 직함이 다른 공적인 일을 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나.

껄끄러운 게 있다. 그러나 어쩌나. 하고 싶은 건데. 노사모는 내가 정치인으로서 하는 게 아니다. 생활인으로서의 정치행위다. 나는 정치할 생각도 없고. 그런데 영화인들 중에도 그렇게 보는 이가 많다. 웃긴다. 사람이 정치에 관해 말하면 잇속이나 이윤을 보고 하는 것으로 여긴다. 우리 정치가 문제가 많아서이겠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 한국영화 선풍의 큰 이유가 민주화다. 표현의 자유다. 전두환 때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 수 있었겠나. 그동안 있었던 민주화의 발전이 영화발전의 큰 거름이다. 중국 봐라. 검열 때문에 영화산업이 저렇지 않은가. 물론 그래서 내가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게 아니다. 정치를 이상하게 보지 말라는 거다.

앞으로 영화인회의 같은 데서 일을 할 생각은.

이제 그런 것 안 하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 98년부터 정신없이 산 경향이 있다. 여기저기 불러서 갔다. 나를 필요로 한다 싶으면 갔다. 하지만 나도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다. 연애할 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여자애들한테 욕 많이 먹었다. 내가 공적인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잘못 알려졌다. 공적인 일은 성실하고 자기보다 세상과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이들이 하는 거다. 나는 게으르고, 내가 박수받는 것 좋아하고, 비난받으면 흥분한다. 수를 내다보지도 못한다. 기반이 짧으니까 화를 내는 거다. 감정적으로 판단하니까. 실수도 많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왈왈대는 거다. 스크린쿼터가 문제되면 싸우자 왈왈대고, 영화인회의 만들 때 모이자 왈왈대고. 지금은 시스템으로 갈 때다. 내가 할 게 아니다. 내친 김에 배우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다. 너무 안 나선다. 스크린쿼터 투쟁할 때 노동자들이 함께 싸워줬다. 문화주권의 문제라며. 그래서 스크린쿼터 지켰다. 그런데 지금 외로운 시민운동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여러 행사를 할 때 배우들이 왜 안 가주나. 왜 아직도 성기 형(안성기), 문성근처럼 거절 못하는 사람들, 또는 아직도 <한겨레> 보고 <인물과 사상> 읽는 이혜은이나 방은진만 가나. 물론 하는지도 모르지만 내 눈엔 잘 안 보인다. 연기가 어디에 기초하는가. 사람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다. 간접경험과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야 한다. 거울만 봐서 되는 게 아니다. 글 임범 isman@hani.co.kr·사진 정진환 jungi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