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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열풍 속 흥행호조, <해적, 디스코왕 되다> 김동원 감독
2002-06-19

“나는 80년대 모른다, 솔직하게 만들었을 뿐”

월드컵 열풍으로 파리 날리던 극장가에 <해적, 디스코왕 되다>가 뜻밖의 바람을 몰고왔다. 개봉 첫 주말인 지난 6월8∼9일 이틀 동안 전국 51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스타 파워가 센 것도 아니고, 감독도 신인이고, 80년대로 보이는 복고적 시대배경에 멜로와 코미디와 춤이 두서없이 어울려 딱히 장르를 구분하기도 애매한 이 영화의 흥행은 뜻밖이다. 김동원(28) 감독의 말마따나 “순진하고 솔직한” 영화의 모습이 그 비결인 듯하다. 복고적인 영화의 분위기와 달리 긴머리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쓴 김 감독은 요즘 젊은이들 같았다. 얘기 도중 “이거 말 되나요?” 하며 곧잘 웃는 표정에서 재기가 읽혔고, 가끔씩 20대 답지 않게 속깊은 말을 하기도 했다.

포항에서 태어난 그는 ‘포스코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랐다. 학창 시절 서울에서 화제가 되는 영화나 연극이 포항제철소 직원들을 위해 바로바로 포항에 내려왔고, 그때마다 포철 직원들 틈에 끼어서 구경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텔레비전에서 봤던 한 한국영화가 그의 진로를 결정했다. “영화는 재밌든 재미없든 나름의 법칙으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영화를 보니 나도 저것보다는 잘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감독이 되자고 마음먹고는 고교 졸업 뒤, 해병대를 갔다와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이곳저곳 워크숍에 참여하다가 서울예대에 들어가서 졸업작품으로 98년에 만든 단편이 였다. 그걸 장편으로 확대한 <해적…>으로 김 감독은 데뷔하자마자 흥행감독이 됐다.

한번 한 얘길 다시 하면서 데뷔한다는 게 드문 일인데.

장편 준비하면서 포기해버려? 그런데 버릴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식 못 버리듯. 이건 내가 해야 해. 세편은 해봐야 감독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적…> 하면서 많이 배웠다. 25억원짜리 과외였다. 한번 더 해보면 좀더 배우고, 세 번째는 홈런 날려야지. 후회없는 영화. 물론 <해적…>도 후회는 없지만 연출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까.

80년대에 대한 특별한 인상이 있나.

그런 건 아니다. 장편 만들면서 현재의 이야기로 해보려는 생각도 했다. 원조교제도 나오고, 춤은 힙합 추고…. 그런데 자신이 없더라. 나는 자신없으면 못한다. 디스코가 좋고 옛날 이야기가 더 편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왜 힙합이 재미없지? 코미디도 구봉서, 이기동 그런 분들의 만담 같은 개그가 좋다. 구조나 형식이 요즘 코미디와 비교가 안 된다. 예술이다. 영화도 고전이 좋고, 요즘 건 재미없다.

그때면 10살 무렵인데 디스코 췄나.

영화의 춤은 디스코라기보다 그냥 춤이다. 차차차를 변형한 것도 있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춤을 연출한 거다. <토요일 밤의 열기>를 장편 준비하면서 봤는데 너무 시시했다.

그러니까 80년대라는 건 과거라는 이미지의 추상형에 가까운 것인가.

그때 재밌게 기억되는 것들을 집어넣었다. 서울우유 병 같은 거. 베지밀은 병이 나오는데, 우유는 왜 병이 안 나오지? 병이 팩보다 느낌이 좋은데. 그런 게 사라지는 데 대한 아쉬움 같은 거다. 이사할 때 뒤에서 이삿짐 밀어주는 정서, 지금은 없다. 너무 삭막하다. 죽일 때도 열번, 스무번씩 찌르고. 나는 <친구> 재미없게 봤다. 초반 30분만 재밌었다. 뒤는 억지 같았다. 내 영화도 마찬가지겠지만.

처음에 단편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어떤 점에 끌렸나.

이야기 자체가 특이하고 재밌었다. 교복입고 나와서 춤추고 싸우고. 춤과 액션이 있고, 싸움꾼이 춤으로 여자를 구한다…. 650만원을 여기저기서 빌려서 찍다보니까 이렇게 할 게 아니다 싶었다. 또 시나리오는 더 길게 해야 할 이야기인데. 그래서 장편을 했다. 그러다보니 내 20대가 <해적…>과 함께 갔다.

이대근의 첫사랑이 해적의 어머니라는 건 좀 무리 아닌가.

장편 시나리오 작업 하면서 마지막 부분이 잘 안 풀렸다. 해적이 디스코경연대회에서 1등을 해서 봉자를 구한다는 설정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배제했다. 1주일 만에 디스코왕이 된다는 건 웃기지 않은가.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엄마가 나와서 말도 안 되는 장난을 해결해준다는 발상이 떠올랐다. 어색할 수는 있지만 귀엽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단편에선 해적이 막춤을 춰서 1등을 한다. 단편에는 그런 게 많았다. 마지막에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럼 우리나라가 잘살게 되는 거야?”라는 희망적인 대사로 끝낸 것도 지금 보면 창피하다. 너무 얄팍한 것 같다. 자료조사하다가 81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넣은 건데. 그래서 장편에서는 솔직하게 간 거다. 나는 80년대 모른다.

그냥 해적이 춤을 잘 춰서 1등상을 받는 걸로 했으면 안 될 이유가 있나.

나는 어설픈 게 좋다. 약간 뒤떨어지고, 잘 넘어지고, 바보 같고. 해적이 1등 해서 봉자와 끌어안고 그런 건 어색하다. 물론 춤의 비주얼을 <울랄라 씨스터즈>처럼 했다면 관객이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랑루즈>처럼 못할 바에는 어설프게 가는 게 더 낳지 않은가. 다음엔 잘해야지. <물랑루즈>처럼. (웃음) 처음부터 컨셉을 어설픈 걸로 잡았다. 데뷔작이니까 솔직하게 하자. 나름대로 실험도 해보고 싶었다. 드라마도 기승전결이 아니라, 처음부터 파동치는 형태로 했고. 딴에는 젊은 감독답게 한 건데, 봐주는 사람들이 다른 의미에서 어설프다고 한다. 의도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어설프다고. (웃음)

준비중인 다음 영화가 있다는데, 거기에도 춤과 액션이 있나.

있다. 어설픈 느낌을 지워서 보는 이들이 “저 감독 맞아?” 하게 할 거다. 영악하게, 하나도 안 순진하게 할 거다. 그런데 <해적…>은 내가 50살쯤 돼서 봐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꼼수를 안 부린 것 같아서 좋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고.

이대근의 졸개로 나오는 주명철씨가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아름답소!” 하는 대사는 압권이다.

나는 배우들의 애드리브를 많이 존중해준다. 그러다보니 단역들끼리 경쟁이 심했다. 쟤가 저렇게 재밌게 해? 나도 뭔가 하자. 그런 식이었다. 촬영 전에 스스로 뭔가를 궁리해서 가지고 온다. 주씨도 그랬다. 들어보니 재밌어서 하자고 했다. 그뒤부터 촬영장에서 유행어가 됐다. 믹싱, 편집하는 분들이 작업 중간중간에 “아름답소!”를 연신 외치고, 다른 스탭들도 지나가는 여자 보고 또 그러고.

똥장면이 유달리 많고 실감난다.

마지막에 해적과 성기, 봉팔 셋이서 똥 푸는 장면은 진짜 똥으로 했다. 진짜 똥을 퍼봐야 연기가 실감날 것 같아서였다. 그 장면을 맨 먼저 찍었다. 그때 미술팀이 진짜 똥을 보고나서 가짜 똥을 만드는데 너무 실감나는 거였다. 똥장면을 일부러 많이 넣자는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 봉팔 아버지가 똥차 밀다가 사고나는 건 이야기의 시작이니까 뺄 수 없고, 그뒤에 봉팔이 혼자 푸는 건 봉팔의 고생을 표현한 거고, 마지막에 셋이 푸는 건 우정이고.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

외국영화는 잘 안 본다. 이장호, 배창호, 이명세 이 라인을 좋아한다. 이 라인이 이명세에서 끊겼다. 그게 참 안타깝다.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연출부 일을 했는데, 기회만 됐다면 이명세 감독 밑으로 갔을 거다.

배창호 감독 영화 중엔 어떤 게 제일 좋은가.

<기쁜 우리 젊은 날>이다. 놀이터에서 안성기가 최불암에게 안겨 엉엉 우는 장면, 너무 좋다. 실험도 많았던 것 같다. 안성기가 김서린 안경으로 황신혜를 보는 건, 아마도 김서린 안경을 카메라에 걸고서 찍었을 텐데 재밌지 않은가.

밝고 따뜻한 영화를 좋아하나.

그런 편이다. 나는 매우 긍정적이다. 농담을 막 던지면서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것. 어떤 사람이 곧 죽는데, 가족들 다 모인 자리에서 “슬퍼하지 말아라, 음악을 틀어라” 하는 거. 나도 그렇게 죽을 것 같다. 죽을 때도 웃는 게 좋다. 얻어터져도 웃고. 나는 어떻게든 재밌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어설프든 세련됐든….

다른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제일 싫어하는 게 ‘무서운 여자들’이라고 했던데.

여자들 무섭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더 이성적이지 않나. 영화평론가도 유지나, 심영섭 무섭다. 변영주 감독 무섭다. 남자보다 여자 좋아하고, 말은 또 얼마나 잘하나. 여자들한테 많이 당한 것 같다. 여자들이 나를 보면 보호해주고 싶은가보다. 편안해하고 그러는데 나중에 보면 당한 게 많다. 여자들은 심중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들은 알기 쉽지 않은가.

꼭 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사랑영화, 슬픈 사랑이든 웃기는 사랑이든.

여자들 무섭다면서.

안 무서운 여자 골라서. <정사> 보면서 이재용 감독 되게 부러웠다. 내가 저런 거 해야 하는데. <지독한 사랑> 보고서는 내가 <지독한 사랑2>를 찍고 싶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도 사랑 이야기이고. 나는 보고나서 어떤 장면이 오래도록 각인되는 영화가 좋다.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택시 타고 강원도까지 가고 이영애가 기다리고 그런 장면.

<해적…>에서 관객이 오래 간직했으면 싶은 장면이 있다면.

봉자가 디스코경연대회 전날 밤 이불에서 혼자 구르는 장면이 있다. 뭔가 되게 바라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게 사실적이지 않은가. 그때 창가에 비치는 초승달은 이명세식 표현주의이고. 이 초승달은 이명세 감독에 대한 오마주다. 홍상수식 사실주의와 이명세식 표현주의의 중간단계쯤? 말이 되나?

아쉬운 건.

좀더 영화적으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25억원을 들였으면 그만한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상품을 잘 만든다는 건 아직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참 애매하다. <포레스트 검프> 같은 것도 너무 짜여져 있으니까 재미가 덜하다. 뭐가 답인지 잘 모르겠다. 정말 대중영화라면 할리우드 같은 상품을 내놔야 했겠지만…, 왠지 그런 건 잘 안 할 것 같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보니까 영화적 표현기법을 쓰는 솜씨가 대단하더라. 그런데 그런 건 앞으로 다른 감독들도 잘할 것 같다. 이제는 철학의 문제인 것 같다. 내가 뭘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이 색을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지 확실히 아는 것. 그게 최고의 철학 아닐까. 어떤 제작자가 영화를 하려면 개똥철학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영화라는 건 참 고급예술 같다. 글 임범 isman@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