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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데뷔 준비중인 <주유소 습격사건> <라이터를 켜라> 작가 박정우
2002-07-04

“이류는 세상을 지키고 삼류가 세상을 바꾼다”

박정우(34)씨는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다. 흥행성적만 놓고보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선물>이 그가 쓴 시나리오였고 앞으로 개봉할 <라이터를 켜라>와 <광복절 특사>도 박정우씨의 펜에서 나온 작품이다.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대접이 형편없다고 소문난 충무로지만 그의 경우는 좀 다르다. <신라의 달밤> 각본료로 3천만원을 받았으니 다른 작가보다 월등히 비싼 작가라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이 영화의 흥행지분 10%로 3억4천만원을 챙겼다. 그는 지금도 각본료로 3천만원을 받지만 대신 흥행지분을 요구한다. <라이터를 켜라>는 20%, <광복절 특사>는 10%의 흥행지분을 갖고 있다. 그는 자기가 돈 번 얘기를 꼭 써달라고 말한다.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대우가 좋아져야 된다고 백번 떠드는 것보다 돈 많이 번 모델이 생기는 게 작가들에게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씨네21>이 매해 뽑는 ‘한국영화산업 파워 50’에 “시나리오 작가가 1∼2명이라도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작가에 대한 시선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터를 켜라>와 <광복절 특사>가 흥행에 성공하면 정말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박정우씨는 최근 시네마서비스 이사였던 지미향씨와 함께 필름매니아라는 영화사를 차렸다.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여전히 김상진 감독과 함께 <광복절 특사>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려 있었지만 앞으로 그가 할 일은 시나리오 작가를 뛰어넘는 것이다. 영화사를 차렸으니 제작자로 신고는 한 셈이고 내년엔 반드시 감독 데뷔를 할 작정이다. 실제로 그는 전업 작가를 목표로 한 적이 없다. 1990년 정지영 감독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연출부를 시작으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너에게 나를 보낸다> <꼬리치는 남자> <체인지>까지 5편의 영화에 연출부로 참가했다. 감독이 되는 길 중 하나로 시나리오 작가를 선택한 그는 <마지막 방위> <키스할까요> <산책> 등을 거쳐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비로소 흥행 작가가 됐다. 사무실에서 첫 인사를 나눈 다음 그가 건넨 명함에는 ‘시나리오 작가’나 ‘필름매니아 공동대표’가 아니라 ‘감독 박정우’라고 또렷이 박혀 있다.

1969년생인데 1990년에 연출부에 들어갔으면 꽤 일찍 현장 경험을 쌓은 편이다. 어떻게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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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고 감독을 하고 싶고 그랬던 건 아니다. 외대 신방과를 다녔는데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재미있어 보여서 영화 동아리 활동을 했다. <화산고>의 김태균, <동승>의 주경중 감독 등이 활동했던

울림이라는 동아리다. 여름 방학 때 단편영화를 찍다가 돈이 없어서 중단됐는데 성에 안 차서 현장에 가겠다고 했다. 학교 선배들 중에

조감독을 하던 사람들이 있어서 조감독협의회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다가 90년 겨울부터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연출부로

일했다. 그땐 집에서 많이 반대했다. 부모님이 젊은 나이에 겉멋이 들어서 저러는구나 여겼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외무고시 준비하는

걸 바랐고 영화 계속하면 학비를 안 대주겠다고 하셨다. 실제로 연출부해서 번 돈으로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언제쯤인가? 90년대 초반에 연출부 생활을 했으면 현장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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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아리를 하면서 감독이 최고라는 걸 알았다. 연출부를 하면서도 그랬으니까 자연스럽게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그림도 소질이 있어서 미대를 갈까 고민한 적도 있는데 방구석에 처박혀 그림 그리는 거는 사내가 할 일이 아닌 거 같더라. (웃음)

조감독 2편을 하고나서 시나리오 작가를 시작했는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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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까지 하고나서 감독이 되는 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유학을 가거나 조감독을 몇편 더하거나 몇 가지 길이

있는데 내 형편에는 시나리오를 쓰는 게 맞는 거 같았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각색작업에 참여하면서 글을

좀 쓴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할 만하다고 여겼다. <체인지> 전에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일도 있었으니까.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3편만 써보고 데뷔하자고 생각했다. 나중에 감독이 되더라도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영화화된 시나리오는 <마지막 방위>가 처음인데 영화사의 의뢰를 받고 시작한 작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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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서 이런 소재가 있는데 써보겠냐고 해서 시작했다. 시나리오에 대한 반응은 괜찮았지만 캐스팅이 목표대로 되지 않고 촬영

중에 영화사가 휘청거리는 일도 있었고 결과는 좋지 않았다. <키스할까요>와 <산책>은 동시에 썼던 시나리오

2편인데 김태균 감독이 <키스할까요>를, 이정국 감독이 <산책>을 연출했다. <산책>의 2고까지

쓰고 이정국 감독이 직접 고쳐서 만든 반면 <키스할까요>는 김태균 감독하고 6개월간 같이 작업했다. 중간에 때려치운다고

하기도 했다. 작가 입장에선 감독이 큰 틀에서 방향을 제대로 정해주지 않으면 힘들다. 감독과 작가가 싸우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내 원칙은 작가는 감독이 원하는 대로 맞춰줘야 된다는 것이다. 내 경우엔 만날 때마다 싸우고 그래도 촬영 끝까지 작가를 부려먹는

감독이 좋다. 작가가 촬영현장 찾아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감독들이 있다. 각본료만 제대로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감독이

좋겠지만 끝까지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 더 나은 작품이 나오고 내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 특사> 연이어 3편을 김상진 감독과 작업하고 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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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원래 내 잘난 맛에 사는 놈이어서 김상진 감독 이전 영화를 높이 평가하는 편은 아니었다. <주유소 습격사건>

시나리오를 좋게 봤다니까 고마웠다. <마지막 방위> <키스할까요>, 다 흥행에 실패해서 누구라도 내 시나리오로

영화 찍는다면 고마워할 찰나였다. 5개월간 같이 작업하면서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 머리 아픈 얘기 잘 안 하고 촬영현장에서도

날 부려먹었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둘 다 현장에서 촬영 전날 밤에 마지막 장면 시나리오를

다시 썼던 작품이다.

전작들이 빛을 못 보다가 <주유소 습격사건>이 첫 흥행작인데 왜 잘됐다고 생각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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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얘깃거리였던 거 같다. ‘쌈마이’라는 말도 듣지만 밑에 깔린 정서가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상진 감독이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붙잡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만 생기도록 하자고 했는데 그런 게 먹힌 거 같다.

나는 특별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보통 사람으로 살았고 꼭 그만큼 느낀다. 어깨에 힘주는 것도 못하고 철학이나 깊이, 그런

거 잘 모르고 못한다. <주유소 습격사건> 시나리오 쓸 때도 김상진 감독이 주유소에서 한달간 취재해서 쓰자고 제안하는

걸 거부했다. 내가 아는 주유소라는 공간, 그 정도에서 이야기가 나와야지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물>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등은 어떻게 시작한 작품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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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할까요> 촬영 중반쯤 어머니가 암판정을 받았다. 병원에 안 가겠다는 어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영양제라고 속이고

항암제를 맞히고 그랬는데 <주유소 습격사건>은 그 와중에 썼다. 병실에서 코미디 각본을 써야 되는 그 상황이 <선물>을

쓰게 된 계기다. 체험하고 있는 얘기라 잘 쓸 거 같았다. <라이터를 켜라>도 그때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이다. 병원 화장실에

갔다 라이터를 잃어버렸는데 라이터를 잃어버린 사람이 그걸 찾으려고 애쓰는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프로듀서 이관수씨한테 그

얘길 했더니 재미있겠다고 해서 쓰게 됐다. <신라의 달밤>과 <광복절 특사>는 원래 다른 데서 기획된 작품인데

나중에 작가로 참여하게 됐다. 이번엔 내 작품 연출해야지 하면서 <광복절 특사>까지 오게 됐지만 지금은 정말 내가 연출할

작품을 쓰고 있다.

<키스할까요>나 <선물>은 다르지만 대체로 코미디를 많이 썼다. 특별히 코미디에 재능있다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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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은 사실 코미디가 아니라 멜로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두편이 워낙 흥행이 잘돼서

박정우, 하면 코미디 작가로 인식되고 있지만 멜로를 하고 싶고 더 잘할 자신이 있다. 코미디는 쓰는 건 쉬운데 찍는 건 자신없다.

재미있다고 찍었는데 그걸 관객이 보고 웃어줄지 확신이 없다. 그래서 개봉할 때까지 조마조마하다. 창작자 입장에선 자기가 만든 얘기가

오래 기억되거나 여운을 남기는 걸 기대하게 마련인데 코미디보다는 멜로가 그런 쪽인 거 같다. 가슴에서 울컥울컥하는 것이 많다.

‘쌈마이’ 혹은 ‘삼류코미디’라는 비판도 많이 들었을 텐데 그런 비판을 접할 때 어떤 기분이 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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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그런 반응 들어도 여유가 있고 귀담아듣지도 않는다. 흥행이 덜 되더라도 작품성 있는 걸 쓰자, 그런 생각 안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거 이상은 손대지 말자, 아는 만큼만 쓰자, 그렇게 생각한다. <라이터를 켜라> 촬영현장에서 배우 김승우씨가

날 보면 농담으로 “어이, 깊이없는 작가”라고 부르는데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다. 이관수 프로듀서랑 나랑 같이 만든 격언이 하나

있다. “이류는 세상을 지키고 삼류가 세상을 바꾼다.”

감독 데뷔할 작품은 어떤 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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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독 때부터 생각한 아이템인데 지금까지 남들에게 주지 않은 게 있다. 96년에 구상했던 거니까 지금은 많이 바뀌어야 되는 거지만

처음 생각해냈을 때 ‘바로 이거야’라고 했던 작품이다. 코미디, 액션, 멜로, 판타지가 다 섞인 영화다. 제목은 <간다>.

박정우의 <∼한다> 시리즈 1탄인데 2탄은 <쏜다>, 3탄은 <난다>다. <간다>라는

제목이 별로 안 좋다는 말도 있지만 임팩트가 있지 않나?

시나리오 쓰는 사람들에게 성공한 작가로서 조언을 한마디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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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을 구하는 사람들한테 늘 하는 얘기가 습작으로 써보고 아니다 싶으면 빨리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리고 환경 탓 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보기엔 여건이 많이 좋아졌다. 예전엔 돈 한푼 못 받고 영화가 무산된 일도 많은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 내 경우를

돌아보면 처음 쓸 때 치열하게 썼다. 낮에는 현장에서 연출부하고 밤에 돌아오면 시나리오를 쓰는 식이었다. 누가 방을 마련해주고,

돈을 주고 그런 거 없었다. 환경이 안 좋아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불평하지 말고 떠나면 된다. 그리고 실질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빨리 써야 먹고산다. 한달에 1편은 써야 그중 1년에 1∼2편 영화화될 수 있다. 너무 남들이 안 한 이야기에 매달릴

필요도 없다. 참신한 아이디어보다 뻔한 것도 잘 풀어가는 능력이 중요하다.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