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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지성미에 중독되다, <레퀴엠>의 제니퍼 코넬리

손대지 말 것. 그저 바라볼 것. 제니퍼 코넬리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득히 기억의 강을 거슬러올라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최근 <레퀴엠>까지 그는 그저 훔쳐볼 뿐, 빼앗거나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화장실 틈새 너머 자신을 엿보던 소년의 눈길을 의식하면서도 먼지보다 가볍게 아라베스크와 양트르샤를 반복하던 발레소녀였을 때나, 피를 흘릴지언정 먹히지 않는 제단 위의 양처럼 마약상의 섹스파티에 전라로 누운 뉴욕의 마약중독자일 때나, 제니퍼 코넬리는 도도하고 강하다.

21세기는 제니퍼 코넬리에게 르네상스였다. 학업으로 잠시 중단했던 연기를 다시 시작했지만 성인이 된 그에게 요구되는 연기는 <원스…>의 12살 데보라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치명적인 유혹으로 남자들을 홀리는 몇몇 배역을 전전하던 그에게 <레퀴엠>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렸다.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이야기 방식은 마치 ‘거울의 방’ 같아요. 분명 현실을 비춰 보이지만 지독히도 과장되어 있죠. 특히 <레퀴엠>은 이 중독의 시대를 휼륭하게 표현한 시나리오였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죠, ‘마약중독자라니 미쳤구나, 도대체 왜 이걸 하려는 거야?’” 하지만 그녀는 주저함 없이 <레퀴엠>의 중독 속으로 빠져들어갔고 촬영에 필요한 자신만의 리서치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뉴욕의 한 아파트를 렌트해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는 영화 속 마리온처럼 살았다. 밤새 그림을 끼적거리고 그녀가 들을 법한 음악을 듣고 옷을 찢었다. 한때 마약에 중독되었다가 극복한 친구를 인터뷰하기도 했고, 수차례 ‘NA모임’(익명의 마약클럽)에서 어울리기도 했다. 그리고 “거의 맨몸으로 총알을 맞은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촬영을 마쳤다. 결국 <레퀴엠>에서의 호연은 할리우드에 제니퍼 코넬리라는 배우에 대한 뒤늦은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론 하워드는 <뷰티풀 마인드>의 알리샤 내쉬 역에 주저없이 그를 지목했고 코넬리는 “성격 나쁘기로 유명한 러셀 크로가 꼼짝 못할 만큼” 대등한 연기를 펼쳐 보이며 이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및 각종 영화제의 조연상을 휩쓸었다.

깊은 눈매와 흑갈색 머릿결에서 풍기는 독특한 외양 때문에 ‘섹시한’, ‘뇌쇄적인’ 등의 수사가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제니퍼 코넬리는 심장보다는 뇌세포의 박동을 따라 움직이는 배우다. “영화를 찍기 전 제니퍼와 함께 맨해튼 동부를 며칠 밤 어슬렁거린 적이 있다. 그녀는 오로지 입을 꼭 다문 채 자신이 연기하게 될 부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에만 집중해 있었다”는 애로노프스키의 증언이나 “세트에서는 수다떨기보다는 늘 혼자 연기에 집중해 있는 편이라 그녀를 알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뷰티풀 마인드>의 프로듀서 브라이언 그레이저의 푸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일과 스탠퍼드를 거친 그는 “감성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배우다. 본인도 “학창 시절의 나는 일종의 완벽주의자였다. 물론 연기는 공부보다 여지가 많은 작업이지만 여전히 자기방어 본능이 어떤 사람보다 강한 것 같다”며 스스로를 진단한다.

뉴욕 빈민가 소년의 동공에 눈부시게 반사되던 12살 소녀도 이제 5살 소년의 엄마가 되었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며 뒤늦은 인사를 건넨 할리우드를 향해 사뿐히 치마 한끝을 올려보이고 있는 제니퍼 코넬리. 리안 감독의 <헐크>로, 벤 킹슬리와 함께 출연할 예정인 <하우스 오브 샌드 앤 포그>로 그는 오늘도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마치 배우로서 상실한 이십대의 시간을 되찾기엔 아직도 멀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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