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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소망은, 체 게바라, 배우 베네치오 델 토로
박은영 2001-04-03

“촬영에 협조해주신 지역 주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 세상 모든 배우들이 꿈에 그리는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넣고도, 뚱한 얼굴로 다소 난데없고 촌스러운 소감을 말하고 내려온 이 남자. 베네치오 델 토로는 백 마디 말보다 단 한번 눈길과 몸짓으로 내밀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오스카 무대에서도 선보였다. 예의 나른한 권태와 서글픈 허무를 담은 눈, 다듬어지지 않은 무뚝뚝한 행동거지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게 웬 난리야. 상이 뭐 대수라고.”

베를린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오스카 남우조연상 수상자, 한국 극장가에 나란히 걸려 있는 세편의 영화 <트래픽> <스내치> <웨이 오브 더 건>에 출연하고 있는,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배우. 베네치오 델 토로는 갑자기 부상한 배우 같지만, 할리우드의 내로라 하는 감독들이 캐스팅 0순위로 꼽는 배우로, 동료 배우들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배우로, 영화 동네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스타’ 대우를 받아왔다. 황량하면서도 기름지고, 선하면서도 악하고, 강하면서도 섬세하고, 열정적이면서도 무기력한, 그 깊고도 풍부한 얼굴, ‘메소드’ 연기자가 멸종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자기 헌신적인 태도 때문이다. 말론 브랜도, 로버트 드 니로, 잭 니콜슨의 대를 이을, ‘남자’배우로 꼽히고 있지만, 베네치오 델 토로는 그들과 자신의 공통점이 “웅얼거린다”는 것뿐이라며, 어떤 카테고리에 묶이는 것도 거부한다. 1988년부터 시작되는 필모그래피를 되짚어 올라가도, 그런 고집을 엿볼 수 있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그는 10줄이 넘지 않는 대사(수사관이 ‘영어로 말하라’고

화를 낼 만큼 불완전한 영어)를 마치고 사라지는 용의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줄리언 슈나벨의 <바스키아>에서 바스키아의 친구로, 아벨 페라라의 <퓨너럴>에서 정계에 뛰어든 ‘밉상’ 건달로, <트렁크 속의 연인들>에서 인질과의 로맨스에 휘말리는 어눌한 도둑으로, 노는 물이나 하는 짓은 비슷하지만, 분위기와 성격이 극과 극이다시피한 캐릭터들을 종횡무진해왔다.

<트래픽>이 베네치오 델 토로에게 남긴 가장 귀한 보물은, 오스카 트로피도, 전 지구적 스타덤도 아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역에는 의외로 착한 사람들이 많고, 그곳 경찰은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이다. 선과 악, 정의와 출세 사이에서 위험한 곡예를 벌이는 멕시코 경찰 하비에르는, 그런 생생한 정보를 발판으로 태어난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남미 경찰과 갱을 무조건 악한으로 그려내지 않은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그는 인종과 문화에 대한 편견을 답습한 영화를 경계하면서도, 그 때문에 작품난을 겪고 있다는 라틴계 배우들의 볼멘소리에 동조하지 않는다. 영화는 세상 누구에게나 고달픈 일이니, 멀거니 앉아서 ‘출연하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대신, 스스로 빛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 “기존에 할리우드에서 시도한 것과는 뭔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로맨틱한 비전을 갖고 있다”는 그는, ‘필생의 영화’로 체 게바라의 전기영화를 꼽는다. 체 게바라와 베네치오 델 토로, 왠지 어울리는 궁합 같다.

“그는 숲 속에서 걸어나와 영화를 더 근사하게 만들어놓고 사라지는, 연기하는 동물이다. 겁이 없고 캐릭터 감식안도 뛰어나며, ‘날 좀 보라’고 나서지도 않는다. 그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는 경우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 때뿐이다.”(숀 펜) “우리는 자주 만났고 오랜 시간 작품에 대해 얘기했다. 그 덕에 영화는 더욱 감성적이고 흥미진진하고 진솔해질 수 있었다. 그토록 자발적이고 깨어 있는 배우를 기꺼이 활용하지 않는다면, 바보 천치다.”(스티븐 소더버그) “그는 어둡고 무심하고 위험하고 섹시한 매력으로, 마치 자석처럼 카메라를 끌어당긴다.”(테리 길리엄)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그는 대사도 적은데다 일찍 죽기까지 하지만, 그해 최고의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연기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걸. 하지만 난 끝내주는 천재야.’”(맷 데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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