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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바친다”
2001-04-10

3년의 휴식 끝에 <집으로…>로 돌아온 이정향 감독

“안녕하세요, 감독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맨숭맨숭 입에 올리던 별 뜻 없는 인사말이 이정향(37) 감독을 만나서는 가장 굵직한 질문이 됐다. 3년 전 겨울 우리를 예쁜 자전거에

태워 미술관 옆 동물원에 데려다놓고는, 지금껏 편지 한통 없었던 그녀가 드디어 두 번째 영화 소식을 알려왔다. 왜 그리 오래 걸렸냐고 볼멘소리를

하려다보니, 하긴 이정향 감독은 언제나 넉넉한 ‘쉼표’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조감독이 되고, 두 번째 조감독을 하고, 데뷔하기까지 그는

매번 2년, 3년의 터울을 타박타박 건너왔으니까. 튜브픽처스가 <파이란>에 이어 두 번째로 제작하는 영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는,

“엄마가 섬 그늘에…” 하는 동요 소절을 흥얼거리게 만드는 할머니와 손자의 이야기. 갑작스런 ‘동거’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세상이 잘 알지

못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일러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집으로…>는 <미술관 옆 동물원>과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무엇을 만들어낼 궁리인지, 물어야 할 것은 딱 두 가지라 생각했는데, ‘수다’가 끝났을 때 테이블 위의 1.5리터짜리 오렌지주스 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동안 뭘 하고 누구를 만나며 지냈나.

한 1년은 <미술관 옆 동물원>을 잊는 일을 했다. 동네 만화가게를 두루 돌아다녔고 집 근처 한강변도 걸었다. 밖에서 타기는 좀

창피해서 집안에서 킥보드를 타기도 했고. 케이블TV 드라마 <섹스 앤 시티>와 <프렌드>도 방영시간 맞춰 택시를 잡아탈 정도로 즐겨봤다.

친구는 한두명만 만났다. 지난해에는 <미술관 옆 동물원> 개봉에 앞서 도쿄와 나고야도 다녀왔고 2월 말에는 포르투갈 포르투영화제에 가서

꿋꿋한 포즈로 퇴락한 15세기 도시 건물들을 보고 감동받기도 했다.

<가을동화>도 무척 재미있게 봤다고 들었다.

공들인 배경이 좋았다. 줄거리보다는 대사가 정갈하고 예뻤고, 원빈이라는 배우가 정말 근사했다.

일과 일 사이에 터울이 왜 이리 긴가.

기본적으로 일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가능하다면 조금만 일하고 싶어한다. 코알라를 닮았다. 코알라는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욕창이

생기는 게으른 동물이란다. 빈둥거리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체력이 약하기도 해서 충분히 쉬고 재충전하자는 주의다.

두 번째 영화에 들어가기까지 과정이 궁금하다.

지난해 3월, 완성된 시나리오를 <미술관 옆 동물원>의 제작사에 가져갔는데 기획도 시나리오도 거의 재고 여지가 없다는 거절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사가 갖고 있던 로맨틱 코미디 한편을 제의받았지만 할 생각이 없었다. 마음을 크게 다치고 좌절해서 영화사는 물론 친구들에게도

시나리오를 보이지 않고 은퇴까지 생각했는데, 할머니와 아이에 대한 저예산 영화이야기를 들었다며 튜브픽처스의 황우현 이사가 6월경 연락을

해왔다. 뜻밖에도 튜브와 또 한곳의 같이 일하고 싶던 영화사, 두 제작사에서 의외로 긍정적인 답을 해와 오래 고민하다 먼저 답을 준 튜브픽처스와

일하게 됐다. 2월 초에 결정됐다.

<집으로…>는 언제 처음 착상한 이야기인가.

<집으로…>는 1997년 초 <미술관 옆 동물원> 시나리오를 써놓고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썼던 시나리오다. 쓸 때부터 이건 나의

두 번째 영화가 될 거야 했는데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웃음) 지금도 갖고 있는 초안들 중에 이게 세 번째다 싶은 작품이 있다.

감독의 말로 <집으로…>를 소개한다면.

우리 모두의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아들을 혼자 키우던 젊은 엄마가 생활고로 말미암아, 떠나온 지 10년이 넘은 고향의 어머니에게

일곱살난 아들을 잠깐 맡긴다. 평범한 어린아이인 손자는 구질구질한 시골을 싫어하지만 벙어리인 할머니와 한달간 생활하면서 둘 사이의 뭔가가

변한다. 결국 아이와 엄마는 그들의 ‘집으로’, 할머니도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시선은 상우라는 이름을 가진 손자의 것이지만,

주인공은 산처럼 끄떡없는 할머니다. 상우는 그러니까 돌아오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셈이다.

최근 개봉작 중 히가시 요이치 감독의 <그림 속 나의 마을>이 생각나는데.

행여나 비슷할까봐 <그림 속 나의 마을> <동동의 여름방학>, 허안화의 <상하이의 휴일>, 중국영화 <마음의 향기>를 봤다. 하지만

다행히 설정이나 풀어나가는 방식, 캐릭터가 판이했다. 영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면 비슷해질까봐 남의 영화는 안 본다. 작년말부터 극장에서

본 영화 중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자기 식으로 찍는 이재용 감독의 <순애보>가 가장 좋았다.

외할머니와 각별했나.

태어날 때부터 늘 계셨고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가 지난해 여름 아흔으로 돌아가셨다. 다른 손주도 예뻐하셨지만 우리는 특별히 친밀했다.

나는 할머니와 많이 싸우고 못되게 굴었다. 할머니와 나는 소리지르고 짜증내고 싸웠지만 서로가 없으면 못살았다. 오빠와 여동생은 엄마 가슴을

만지려고 떼를 썼는데 남매 중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스킨십과는 좀 다른 형태의 사랑을 할머니와 나눴던 것 같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할머니

이야기를 울지 않고 하기는 퍽 힘이 들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영화에는 개인적 기억도 들어가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할머니는 곧 자연이다. <집으로…>에서 할머니는 벙어리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사투리 녹취를 누구에게 하나 고민하다,

불현듯 자연이 말이 없듯 할머니가 말을 못한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할머니를 벙어리로 설정하고 수화책을 샀다. 내 외할머니도

언어발달이 미숙했다. 이도 성치 않고 일만 하느라 사람을 많이 못 만나서였다. 식구 중에서 나만은 그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왜 친할머니가 아닌 외할머니인가? 왜 손녀가 아닌 손자인가.

친할머니, 외할머니의 차이는 아시아에서 여성의 위치와 관계 있다. 가부장 사회에서 가장의 어머니인 친할머니에 비해 며느리의 어머니인

외할머니는 약자다. 나는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다함께 모시고 살았는데, 친할머니 밥을 늘 외할머니가 챙겼다. 아들을 둔 어머니라도 딸네

집에 가면 위치가 격하되는 것이다. 우선 약자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손녀 아닌 손자로 정한 것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현장에 남자배우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바라서일까? (웃음) 그게 아니라 내가 할머니를 주로 사내애들 짓거리로 괴롭혀 드렸기 때문인가 보다.

아마 이정향 감독에게 <미술관…>의 춘희 같은 여자이야기를 다시 기대한 사람이 많을 텐데, <집으로…>는 좀 모험적인 선택으로 들린다.

부담은 없나.

첫 영화 때는 여자감독이라는 핸디캡이 있어 확실한 상업영화가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술관동물원>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상업영화이면서도 시나리오의 이중구조가 신인다운 신선함을 담고 있어서 데뷔작으로 적합했다. 두 번째는 다른 영화를 하고 싶었다. <미술관…>은

음식으로 치면 온갖 조미료에 고명을 얹은 현란한 영화다. 하지만 멸칫국물에 가장 간소한 재료로 맛을 내는 좋은 음식도 있다. <집으로…>에는

판타지도 플래시백도 은유도 풍자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좋아할 듯한 이야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소재에 관한 걱정보다 전작을 본 관객이 갖는 영화의 질(質)에 대한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염려된다. 기본적으로 완성도가 높으면

관객은 온다고 믿지만, 하겠다고 나선 제작사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여러 번 한다. 그래서 고맙다. 제작사도 스탭들도 내가 흥행감독이어서가

아니라 이 시나리오에 대한 애정으로 달려들어 주었다.

공간과 인물 관계가 간소한 점은 <미술관…>과 비슷할 듯한데.

그렇다. 아이와 할머니, 몇몇 동네 사람이 나오고, 공간도 산골 마을의 집과 마당이 전부다. 주인공이 여자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점도 같다. 춘희를 통해 여성 내면의 미를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여성의 또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싶다. 꼬마 상우도 <미술관…>의

철수가 어렸을 때 이렇지 않았을까 싶은 캐릭터다.

폴 뉴먼과 영화음악을 좋아하다가 영화에 이끌렸다고 들었다. 역시나 <미술관…>은 배우와 음악이 오래 남는 영화였다. 이번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는.

장소와 배우다.장소는 인물과 연결돼 있다. 아역 탤런트 둘을 후보로 저울질중인 상우 역을 빼면 비전문 배우를 기용한다. 특히 할머니와

마을은 닮아 있어야 한다. 마땅한 공간을 정하면 그 안에 할머니가 계실 것 같다. 그분을 찾아 그분이 살아온 집에서 찍을 생각이다. (막막한

표정을 짓자) 기적을 바랄 뿐이지만 꼭 찾을 것 같은 믿음이 있다.결정만 되면 한달쯤 내가 먼저 집에 들어가 밥도 얻어먹고 기숙하려 한다.지난주에도

강원도와 충청도로 팀을 나눠 헌팅을 다녀왔다. 시골 할머니도 몇분 인터뷰를 하긴 했다. 헌팅이 빨리 되면 일주일 안에라도 크랭크인하고 여기서

막히면 1년이 걸릴 수도 있다.

제작 환경은 만족스럽나. 팀은 다 꾸려졌는지.

“이건 이래도 될까요?”라고 제작사쪽 의견을 물으면, “그건 감독님 마음대로 하는 건데…”라고 답해서 당황했다. 내가 잘못하는 결정까지

전폭적으로 따라주는 듯해서 겁이 더럭 나기도 한다. 그만큼 연출에 전념해서 잘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음악과 편집은 <미술관 옆

동물원>의 스탭과 다시 뭉쳤다. 촬영, 조명, 미술은 신인인데, 데뷔할 무렵 목숨바쳐 일하던 나의 초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 부럽기도 하다.

대강의 스케줄은.

봄에 찍어야 한다. 왜냐면, 찍다가 더워지는 건 몰라도 찍다가 추워지는 건 내가 못 견디니까.겨울보다는 여름이 낫지만 여름은 벌레가

많아 골치다. 두꺼비, 뱀, 개구리도 무섭고. 내 욕심으로는 7월까지는 프린트를 뽑아냈으면 한다. 영화가 잘 나오면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에게

바친다는 헌사를 넣으려 한다. 못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면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를 욕되게 할 것 아닌가. (웃음)

이렇게 맑은 날이면, ‘외할머니가 살아계신다면 같이 할 텐데’ 싶은 일이 없는지.

휠체어에 앉혀 아파트 밖으로 산책시켜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휠체어도 없었다. 할머니는 참 고우셨는데 노인네가 귀신꼴로

나가면 뭐하냐고 고개를 흔드셨다. 하지만 생전에도 한번 못해드린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너무 뻔뻔한 것 같고 그냥,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 순대랑 피자 이런 걸 사서 드시게 해드리고 싶다. 외할머니는 계란프라이도 아깝다며 잘 안 드셨다.

글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