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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의 세계 응시하는 다큐 <영매> 감독 박기복
2002-10-30

˝무당의 굿을 성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다˝

죽은 아들의 말을 전하는 무당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는가 시퍼렇게 날선 작두에 오른 무당의 춤사위를 본 적 있는가 최근 인디다큐페스티벌을 통해 처음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매>는 아마 당신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작품일 것이다. 수천년간 한반도에 뿌리내렸던 무(巫)의 실체를 파고드는 <영매>는 공식석상에선 금기로 여겨졌던 무속신앙 속에 어떤 종교 못지않은 성스러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항의 별신굿에서 시작해 진도의 씻김굿을 거쳐 살아 있는 가축을 제물로 쓰는 황해도굿까지 굿의 모든 것을 두루 살피면서 이 영화는 조금씩 무당이라는 존재의 실체에 접근해간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인 강신무가 주재하는 씻김굿에서, 귀신에게 육신을 빌려주는 이의 아픔은 차마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지만 그렇기에 어떤 장례식보다 숭고한 감동을 전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대로 씻김굿은 수천년 이 땅의 사람들이 죽음과 대면했던 하나의 양식을 보여준다. 핍박과 설움의 세월을 잊고 가라는 그 의식에서 영화는 세상의 죄와 고통을 대신하는 자들의 성스러운 삶의 태도에 경의를 표한다.

3년 가까운 시간을 <영매> 제작에 바친 감독은 <행당동 사람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냅둬> 등으로 알려진 박기복(38)씨다. 부랑자와 앵벌이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우리 사회의 치부를 파헤쳤던 감독이 교양다큐멘터리의 성격까지 있는 <영매>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얼핏 납득이 잘 안 가지만 영화는 핵심으로 근접해갈수록 박기복 감독다운 치열함을 드러낸다. 대상을 향한 애정과 이해심은 박기복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공감을 끌어내는 힘인 것이다. 결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박기복 감독 특유의 끈기가 이번 영화에서도 시적 여운을 남기는 엔딩까지 이어진다. <영매>는 영화음악가로 유명한 조성우씨가 설립한 회사 M&F의 투자와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영화 사전제작지원금으로 만들어졌으며, 11월 부산국제영화제를 거쳐 국내 극장 개봉도 추진할 생각이다.

<행당동 사람들>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냅둬> 등 전작들이 직접적인 사회적 이슈를 건드린 것과 비교하면 이번 작품 <영매>는 문제의식부터 전혀 다르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영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향성이 영적 세계에 있었는데 전작들에선 별로 표현되지 못했을 뿐이다. 무당들이 날 보고 신내릴 팔자라고 하더라. 아마 늘 그런 데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 무당의 눈에도 그렇게 비쳐졌을 것 같다.

그래도 무당의 이야기를 다루겠다고 했을 때는 어떤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 이것저것 머릿속으로만 궁리하다 민속박물관에서 국립영상제작소에서 찍은 4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하나를 보게 됐다. 굿하는 장면을 그냥 찍은 작품이었는데 씻김굿하는 모습이 발레를 하는 것같이 보였다. 같이 봤던 스탭 몇명은 강신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세습무의 씻김굿 장면을 지루해했지만 나는 씻김굿에 매료됐다. 그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래, 이걸 보여주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어떻게 씻김굿하는 걸 그냥 찍어서 보여주면 대다수 사람들은 분명 지루하게 느낄 것이어서 과연 내가 느낀 감동을 어떻게 전달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0년 초부터 6월까지 사전조사와 준비작업을 했고 6월22일 진도로 가서 첫 촬영을 했다.

<냅둬>를 마치고 인터뷰할 때 ‘이제 종로를 떠나겠다’는 말을 했다. 그때 다음 작품에 대한 어떤 방향이 섰던 것인가.

→ 늘 관심있어 하던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보자는 생각은 그때부터 했다. 지향이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가 문제였는데 무당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하는 입장이지만 당대의 어떤 것보다는 문화와 문명, 정신적인 것에 끌리는 것 같다. 수천년 내려온 한국 샤머니즘에 정면으로 도전해본다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영매>의 부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이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의 샤머니즘을 바라보는 감독의 기본적 견해였을 테지만 촬영하면서 애초 구상대로 진행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영매>는 씻김굿의 의미만을 파고드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한국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굿에 대한 교양다큐멘터리라는 느낌이 있다.

→ 전체적으로는 사전조사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의 무속에 관한 책을 수십권 읽었는데 학자들이 연구한 데이터가 많은 도움이 됐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라는 부제 때문에 초반에 나오는 포항의 굿장면은 불필요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냐는 것인데 <영매>는 사적인 다큐멘터리일 뿐 아니라 공적인 다큐멘터리, 교양다큐멘터리라고 생각했다. 미리 정해놓은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굿이 어떤 것인지 민속학자처럼 파고들어가는 면이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사유방식이 자연스레 드러날 수 있다고 봤다. 때로 심심하고 지루할 수 있지만 한 고비를 지날 때마다 비경이 펼쳐지는 파노라마였으면 싶었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도 그걸 2시간 내내 보면 지루해지게 마련이다. 오히려 쉬어가고 멈춰서서 바라보는 순간이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순간 펼쳐지는 비경에 감동하게 되는 것 아닌가.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을 함께 갖고 있는 다큐멘터리라고 말했는데 그게 전작들과 달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양다큐멘터리처럼 진행되다가 차츰 사적인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우리는 전사는 아니다>나 <냅둬>처럼 대상과 감독의 일체감이 드러난다. 관조하는 듯한 태도에서 확고하게 무당의 편에 서는 변화 말이다.

→ 작심하고 두 가지 시선을 병행했다. 사적인 시선과 공적인 시선이 뒤섞이면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작품 전체의 톤을 어떻게 끌고가느냐에 있었다. 아무래도 시선이 혼재되면 톤이 튀는 순간이 나오게 마련인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정서적 측면에 주목했다. 남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등장하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정서에 공감하면 무리없이 받아들일 것이고 공감하지 않으면 튀어 보일 거라고 예상했다.

<영매>를 보고나면 무당이 너무나 불행한 존재로 느껴진다. 귀신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는 강신무의 고통도 그렇고 가난을 무릅쓰고 세습무의 전통을 지켜오는 사람들도 그렇고. 무당이란 사회가 강요해서 만들어진 희생양이라는 느낌도 든다.

→ 사회가 강요했다고 표현하긴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수천년 문화에서 같이 숨쉬었던 존재이고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오히려 무당을 천시하거나 박해하는 식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미신을 몰아내자며 굿하는 사람을 잡아가기도 했고 기독교쪽에서 사당을 부수는 일도 빈번했다. <영매>를 통해 그런 오해와 편견을 부수고 무당의 굿을 성스럽게 보여주고 싶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제사와 크게 다를 게 없는 행위다. 흔히 무섭다, 천하다, 다 사기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은 너무도 자연스런 종교적 심성이었다. 그것은 사회의 압력이나 금지조치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기꾼이라는 시각만 해도 그렇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정치인, 종교인, 교육자 어느 한 군데 오염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가. 일부 그런 예가 있다고 전체를 매도하는 식으로 침소봉대하는 것은 곤란하다. 무당은 무엇보다 그런 편견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일 수 있다.

첫 촬영을 진도에서 했다고 했는데 <영매>는 진도, 해남, 포항 등 남도에서 출발해서 한강 이북으로 넘어노는 여정으로 진행된다. 실제 촬영과정은 어땠나.

→ 진도에서 박영자 보살을 찍으면서 촬영을 시작했는데 며칠 동안은 인터뷰도 잘 안 되고 적응이 쉽지 않았다. 진도에서 다리를 건너 해남에 갔다가 한강 이북을 향했고 포항, 강릉, 계룡산 등 전국을 누비며 찍었다. 촬영에 1년6개월, 편집에 1년이 걸렸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상영하고나서도 지금 재편집을 하고 있다. 공적인 다큐나 사적인 다큐냐에 혼란이 있는 것 같아 휴먼다큐멘터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충청권의 굿을 추가해 넣을 생각이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에게 중립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본 컨셉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혼합에 있는 이상 그런 컨셉을 강화하는 편이 올바르다고 판단해서 몇 장면을 추가하는 것이다.

<영매>에서 인상적인 인물로 강신무인 박미정 보살이 등장한다. 박미정 보살의 이야기를 담은 특별한 계기가 있나.

→ 무당을 소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알게 됐는데 당골(오랜 손님, 단골)과의 관계가 좋아서 택했다. 무당과 당골의 관계는 이 작품의 또 다른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대도시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그들의 관계가 좋아 보였고 그런 신뢰감 때문에 촬영도 쉽게 이뤄졌다. 객사한 아들의 씻김굿을 찍게 된 것도 박미정 보살과 당골의 관계가 절대적 신뢰로 이뤄진 것이라 가능했다.

세습무인 채둔굴 할머니의 죽음을 엔딩으로 택했는데 채둔굴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것이 엔딩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나.

→ 10년이 됐든 20년이 됐든 채둔굴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찍고 싶었고 언젠가 돌아가시면 그것이 엔딩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을 때도 내려가서 할머니의 일상을 찍기도 했다. 게다가 동생이 직접 채둔굴 할머니의 씻김굿을 한다고 하니 이것이 마지막 장면이 되겠구나 싶었다.

앞으로도 영적인 세계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찍을 생각인가.

→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도 관심이 가고 요가철학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무당 얘기로 시작했지만 다음엔 불교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꼭 심각한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영매>에서 할머니들이 죽음을 농담거리로 이야기하는 장면처럼 일상적인데 놀라운 순간들이 있다. 재치와 해학으로 죽음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가볍게 비껴가지 않는가.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느끼는 한계 같은 것은 없나. 수년간 작업해서 한편을 완성하지만 극영화에 비하면 대중과 교감할 기회도 모자라지 않나.

→ 극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다큐멘터리 작가라는 게 재미있고 작품에 대한 성취감도 높다. 작품 한편 하면서 관련서적 수십권을 보면서 공부한 것만해도 남는 게 많다. 물론 다음 작품 하고나면 마흔 넘겠구나 싶을 때는 조급한 생각도 들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극영화는 할 필요가 있을 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고급인력이 다큐멘터리 만드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까운 것은 이 분야에선 성공한 전범이 없다는 점이다. 인디음악이건 뭐건 전부 성공한 전범이 있지만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은 아무리 성공해도 기본적인 부가 보장되지 않으니까 다들 조금 하다가 빠져나간다. 가끔 기록영화로 극장상영해서 돈 벌어보는 게 꿈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