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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임재철,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를 만나다(3)
2002-11-29

˝어느 사회에나 `외부의 눈`이 필요하다˝

당신은 영화비평으로 출발했지만 소설과 에세이를 쓰는 등 다양한 문필 활동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 문학적 야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내 성장기에서 영화와 함께 가장 중요했던 것은 글쓰기였다. 어렸을 때 나는 주위환경을 내가 전혀 제어할 수 없다는 데서 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아홉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이 무력감이 조금 가시기 시작했다. 어렴풋하게나마 말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열다섯살 땐 처음으로 헤밍웨이를 읽었는데 그의 작품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다시 써보는 연습을 했다. 요새 말로 하자면 ‘해체론적 실천’이라고 할 만한 것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은 지금도 내 글쓰기에서 중요한 밑천으로 작용한다.

당신은 50년 넘게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영어로 글을 쓰고 있다. 어떤 점에서 당신은 20세기 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자발적 망명자’들의 계보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내게 특히 흥미로운 것은 당신이 쓰는 언어가 당신의 실제 생활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신이 쓰고 있는 ‘영어’에 대해 어떤 불안을 느낀 적은 없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쓰고 있는 영어가 40년대 미국 중서부의 언어라는 점, 그래서 동시대의 영어와 다를 수 있다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다행히 영어는 이미 ‘보편적인 언어’(lingua franca)다. 현재 미국 독자들에겐 내가 구사하는 영어가 다소 고전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다. 만일 내가 국지적인 언어를 모국어로 가지고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루마니아인이라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어쨌든 50년 이상 외국인으로 생활하면서 나는 언어의 미묘한 차이에 대해 대단히 민감해지게 되었다. 나 또한 내가 쓰는 언어가 같은 영어권 독자들에게 생경한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있다. 그래서 나는 문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가식없고 단순한 스타일을 구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당신은 참으로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해왔고 특히 최근에는 에세이스트나 소설가로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궁극적으로 어떤 ‘문학적 야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글쎄, 야심을 운운할 문제는 아닌 듯하고 우선은 생존(survival)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40권에 가까운 책을 출판했다. 하지만 책을 많이 냈다는 것보단 내 책들이 여전히 읽히고 있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내가 가장 아끼는 내 책은 영화에 관한 책이 아니라 여행기 형식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내해로의 여행>(Inland Sea)이다. 이 책은 5년 이상 절판 상태로 있다가 얼마 전에 새로 출간되었다. 내가 아끼는 책이 여전히 새로운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더할 수 없는 기쁨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생존의 의미이다. 그리고 나는 60년대에 몇편의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기도 했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여전히 있다.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언어의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항상 느끼는 문제지만 언어는 결국 대상의 근사치밖에 제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지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매력적이다. 조금 어려운 표현을 쓰자면 대상의 존재론적인 측면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서 예를 들자면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의 마지막 장면이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당나귀 발타자르가 산 중턱 양떼들 사이에서 죽는 그 장면은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현실이 곧바로 초월론적 차원과 맞닿는 순간이다. 그 장면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 것이다.

9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과 대만, 이란 등 아시아영화들이 주목받고 있다. 당신은 일본 외의 아시아영화들을 꾸준히 봐왔는가.

특히 이란영화를 많이 봤다. 이란영화는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고 개성있다. 그들은 할리우드가 잊은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대만영화 중에선 허우샤오시엔의 영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토록 오즈를 닮은 영화를 만든 그가 <비정성시> 이전까지 오즈 영화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일본어 자막을 읽는데 서툴러서 한국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조금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10년쯤 전에 본 <안개도시>가 인상적이었고, 특히 <죽어도 좋아>는 정말 멋진 영화였다. 정부가 <죽어도 좋아> 같은 영화를 문제삼았던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당신과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미시마 유키오 등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일본 문학자), 도널드 킨 같은 우수한 코멘테이터들의 존재는 일본 문화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 문화 자체가 안고 있는 어떤 속성이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도 있겠지만 당신 같은 관찰자(observer)의 존재도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뭔가 얘기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일본 문화가 해외에 알려지는 데 외국인들, 특히 미국인들의 기여가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우리 세대 이전에 이미 루스 베네딕트 같은 이들의 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느 사회에나 공평한 안목으로 그 사회를 볼 수 있는 ‘외부의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부에만 머무는 사람들에겐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갖기가 참으로 어렵다. 일본에 국한해서 보자면, 일본인들은 나의 비판적인 견해도 받아들여주었다. 이를테면 일본의 급속한 변화에 대해 나는 아주 비판적이다. 40년대 후반의 일본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덕이 많은 사회였지만, 지금의 일본은 참으로 추괴한 몰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그것을 수용하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사실 일본 문화는 주기적으로 ‘가이아쓰’(외압)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주체성이 없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의 개방성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부산=인터뷰 임재철/ 영화평론가·정리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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