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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임재철,일본영화 전문가 도널드 리치를 만나다(1)
2002-11-29

˝어느 사회에나 `외부의 눈`이 필요하다˝

도널드 리치는 50년이 넘도록 일본에 살면서 일본문화와 영화에 관해 글을 써온 사람이다. 1946년 요코하마항에서 처음 일본과 마주했던 리치는 낯선 땅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어느덧 일본과 영어권 국가를 잇는 다리가 되기에 이르렀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가 영어권 국가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리치의 공로가 컸다. 수십권의 책을 펴내 일본영화와 문화를 알린 리치는 아직 옛 모습이 남아 있는 도쿄 부근 우에노에서 광범한 저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글쓰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미지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그는 스스로 실험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왕성한 활동가. 날마다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고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는 날이 없다는 리치는 일본보다 훨씬 늦게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영화로선 부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한국을 찾은 리치를, 영화평론가 임재철씨가 만났다. 그 자신도 일본영화에 해박한 임재철씨는 일본 내에 머무르면서도 이방인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일이 가능했던 이 독특한 위치의 학자로부터 일본영화의 생생한 역사를 이끌어냈고,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

당신은 일본에서 50년 이상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영화 및 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처음 일본에 살기로 결정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어딘가로 이주한다는 것은 어딘가로 향해 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어딘가로부터 떠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하이오 북부의 리마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나도 해병대의 수송병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는 미군 군속으로 외국에서 일하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내가 갈 수 있는 나라는 일본과 독일이었다. 나는 일본을 택했지만, 일본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살던 오하이오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일 거라는 생각에 그곳을 택한 것이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다른 나’가 되고 싶었다.

그렇더라도 50년 이상 이방의 땅에서 살기로 한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내가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그래서 나의 뿌리에 대한 집착도 별로 강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문화에 대한 관심과 흥미도 점차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매일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우는 과정이야말로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살게 된 이후에 비로소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내 세대 미국인들의 성장기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금 젊은이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거다. 30년대 미국엔 영화 이외의 엔터테인먼트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나도 리마에 있는 5개의 영화관을 주말마다 빼놓지 않고 드나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삶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할리우드 스타들을 나의 부모들보다 더 현실감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성장기 탓인지 나는 어떤 나라에 가더라도 그곳의 리얼리티를 영화를 통해 판단하는 버릇이 생겼다. 전쟁 직후 이탈리아에 갔을 때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영화를 통해 그 사회를 판단했다. 그리고 당연히 일본영화를 통해 일본을 알려고 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처음 전문적으로 쓰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 그리고 언제부터 일본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1947년, 미군에서 내는, 일종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성조지>에 영화평을 쓰게 됐다. 처음에는 베티 그레이블의 영화처럼 미군에게 인기있는 영화를 다뤘다.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은 ‘원주민’ 즉 일본인들과는 어떤 접촉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부키를 보아서도 안 되고 다방에 들어가서도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극장에 가서 일본영화를 봤다. 영문자막이 없어서 대사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일본영화에 대해 점차 알아가게 되었다. 그 시절 나의 영화 체험을 소재로 이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올해 비엔나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이 영화는 하와이와 로테르담영화제 등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일본은 5년 정도 미군정하에 있었다. 당시 미군정의 문화정책은 이후 일본문화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미군정은 전쟁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메이저 촬영소 소장들을 영화계에서 추방했고, “봉건적인 사상을 확산시킨다”는 이유로 일본영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르였던 시대극의 제작을 상당기간 금지하기도 했다.

미군정이 편 정책 중 어떤 것은 성공하기도 했지만 어떤 것은 실패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일본인들은 외래 문화 혹은 새로운 문화에 대단히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를 보이지만, 자신들에게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냥 무시해버린다. 나 자신도 일본인들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강요해서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미군이 점령군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예를 들면 당시 미군정이 가장 중시했던 정책인 이른바 ‘재벌 해체’는 결국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끝났다. 당시의 미군이 ‘문화적 제국주의’를 수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이유는 일본인들 스스로가 미국 문화 및 서구 문화를 강렬하게 동경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그런 상황을 잘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검열이다. 일본은 전쟁 중에 정부의 감시 체제하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영화는 소재에 엄청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군정기에는 ‘봉건사상’을 설파하지만 않는다면 어떤 소재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전쟁 전의 일본영화는 키스신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후에는 이것이 가능해졌고, 키스신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일도 있었다.

50년대는 30년대에 이어 일본영화의 두 번째 황금기로 꼽힌다. 당신은 당시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 등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이들의 작품세계를 해외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일본영화에 처음 관심을 가졌을 때 당신이 쓴 책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구로사와와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들었다.

구로사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는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4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쉽게 교분이 생겼다. 그들에게 미국에서 새로 가져온 음반들을 들려주고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그때 잘 알던 사람이 작곡가인 하야사카 후미오였는데 그는 당시 구로사와 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영화촬영장에 가자고 하기에 별 생각없이 따라갔다. 촬영장에서 그는 하와이 셔츠를 입고 있는 사내와 베레모를 쓰고 있는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하와이 셔츠를 입은 사내가 미후네 도시로였고 베레모 남자가 구로사와였다. 그리고 그들이 찍고 있던 영화는 <주정뱅이 천사>였다. 하야사카와 워낙 허물이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구로사와는 나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무례했다 싶을 정도였는데도 관대하게 받아주었다. 50년대 일본영화는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사회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봐도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즈와 구로사와, 나루세 미키오가 모두 50년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게다가 그때 감독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투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일본영화는 솔직히 현실과의 연결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와이 순지와 기타노 다케시, 미이케 다카시 등 인기있는 감독들이 보여주는 일본은 그들이 꿈꾸는 일본일 뿐 현실의 일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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