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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관객이 부처다,<동승>의 감독 주경중
이영진 2003-04-10

주경중(44) 감독은 ‘신용불량자’다. 개인 빚만 10억원이 다된다. 은행에서 융자받고, 카드 돌려쓰는 것도 모자라, 수천만원의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그는 또 ‘불효자’다. 부모가 평생 모아 사놓은 집을 홀랑 잡혀 먹었다. 그것도 모자라 아내가 마련하다시피 한 전세금도 중간에서 몰래 ‘삥’쳤다. 이 모든 ‘비행’이 그 놈의 영화 한편을 찍기 위해서였다면 용서가 될까. 주 감독은 7년 동안의 제작기간을 거쳐 지난해 <동승>을 만들었고, 4월1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동승>의 완성은 누군가의 말처럼 ‘게워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주경중 감독은 10여년 전, 광주민중항쟁을 극화한 영화 <부활의 노래>의 제작자로 충무로에 명함을 내밀었다. 한국외국어대 인도어과 78학번. 대학 시절 김태균(<박봉곤 가출사건> <화산고> 연출), 김대우(<송어> <정사> <로드무비> 시나리오) 등과 함께 영화서클 울림을 만들어서 활동했다. 하지만 충무로는 <부활의 노래>의 흥행 실패 이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또한 연출 경험이 전무한 그에게 메가폰을 선뜻 내주겠다는 제작자도 없었다. 이후 골방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해가며 감독의 길을 호시탐탐 엿봤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제자리걸음을 하던 그가 떨치고 일어난 건 96년. 그를 부축한 건 다름아닌 병상의 어머니였다. 땡전 한푼 없었지만, 현장으로 뛰쳐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도 어머니 때문이었다. 주머니에 돈 생기면 곧장 현장으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는 그는 남들이 쓰고 남은 몇백자 필름을 얻어다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7년. 그가 <동승>을 온몸으로 기워서 만들었다.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기에 3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시사회 때 영화를 통 못 보더라.

상영 때마다 방정맞은 생각이 든다. 사운드가 잘못 나올 것만 같다. 실제로 지난해 가을에 외대 야외에서 튼 적이 있었는데, 분위기 ‘확’ 고조되는 대목에서 ‘딱’ 끊긴 적도 있다. 그땐 정말 돌아버리겠더라. 국제영화제 나가서도 저 애들이 한글을 모르는데, 자막을 일본어로 바꿔치지 않았을까 의심했다.

베를린영화제 상영을 비롯해서 해외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시카고영화제 등에서는 관객상을 받기도 했고.

5분 정도 기립박수 받으면서 태진(도념 역의 배우)이와 몸 비비 꼬고 그랬는데 기분 좋더라. 피켓 들고 다니면서 티켓 구하는 것이나 교민들끼리 ‘<동승> 사랑 모임’을 결성하는 것이나. 이게 영화 만드는 보람인가 싶었다. 교민들에게는 <동승>이 보편적인 주제에다 우리 현실과는 다분히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 더 좋았을 것이다. 홍기선 감독이 그러던데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프랑스 상영 때는 감독과의 대화도 안 하려고 했다고 하더라. 교민들은 모국의 좋은 모습만 보고 싶어하는 일정한 경향이 있다지만, 완성도와 별개로 해외 상영시에 관객의 정서적인 공감대를 건드리는 건 성공한 것 같다. 그 이후에 사채 꿔준 쪽에서도 투자로 전환하겠다고 그런다. 융자해준 한 지점장으로부터는 시사회 때 수고했다며 5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받기도 했다.

7년 동안 버텼고, 결국 영화를 얻었다.

전라도 말에 ‘지게 아니면 바지게’라는 게 있다. 도중에 그만두면 바보된다, 이왕 시작한 거 끝장 보자는 마음에 붙들렸던 것 같다.

연출 경험이 전무하다. 거기다 한때 같이 일했던 조감독보다 늦게 데뷔하게 됐다.

대학 때 시위현장에서 카메라를 들어본 것이 전부다. 때가 때인지라 대학 시절엔 급진적인 영화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학내에서 시위장면을 찍어 다음날 현상해서 벽에 틀어주곤 했다. <부활의 노래>는 제도권 안에서 금기시된 소재를 풀어보자고 해서 시작한 거다. 이거 잘되면 다음엔 교대로 이정국 감독이 제작하고 내가 연출하기로 했는데 결국 무산됐다. 이후에 96년까지 김명곤(현 국립극장 극장장) 형과 함께 장산곶매 이야기를 영화화해보자고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다. 나로선 이게 연출 수업의 전부다. 그러다 <동승>을 하게 됐는데, 그때 연출부였던 김영준(<비천무> 연출)이 나보다 먼저 데뷔하게 됐다. 조감독이던 장형익도 나랑 비슷한 시기에 <>을 선보이게 됐고.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영화화하겠다고 맘먹은 계기는.

어머니가 말기 암 선고 받으셨을 무렵이었다. 위를 반 잘라내자고 해서 수술을 하긴 했는데, 의사가 들어간 지 30분 만에 덮고 나오더라. 불가능하다는 거지. 3개월 남았다고 포기하라는데, 어머니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선배였던 이덕신 형이 그 이야길 듣고서 <동승>이 어떻냐고 했다. 91년에 나도 신촌에서 연극을 봤던 기억이 있고, 그 길로 연우소극장을 찾아가 대본 구해다가 각색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면서. 60년 전 희곡인데 이걸 어떻게 꾸미나 싶은 걱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하나는 간절하게 녹아 있었다. 당시 한달 만에 초고를 냈고, 잘하면 어머니께 보여드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시작했는데, 1년 반 만에 돌아가셨다. 당신께선 영화를 보고 싶어서 더 오래 버티셨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애정이 남다른 것 같다.

농사꾼이었는데도 한여름에 한약 달여서 교실 문 두드릴 정도로 유난스러운 분이셨다. 그랬는데도 아들은 고등학교 때 퇴학당한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니면서 부모에게 내 대신 두번씩이나 자퇴서에 도장을 찍게 한 불효자였다. 대학 졸업한 뒤에도 영화한답시고 몇천만원씩 손벌렸고. 그래도 아무 말 없으셨다.

촬영을 시작한 건 정확히 언제부터였나.

99년 9월부터 들어갔다. 6월부터 여름장면 촬영에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그게 미뤄졌다. 주변에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는데, 6월에 가면 7월에 오라고 하고, 7월에 가면 8월에 보자고 했다. 잡고 늘어진 지 3년째였는데,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무리하게라도 일을 저질러야 할 것 같았다. 나이트클럽 하는 친구가 1천만원 줬고. 관광버스 회사 하는 친구한테선 버스를 빌렸다. 현재 서울종합촬영소 소장으로 있는 이덕행 선배의 도움으로 태창필름에서 외상으로 필름을 구해왔다. 카메라는 이틀만 쓴다고 빌려놓고서, 설마 산골까지 뺏으러 오겠느냐 뭐 그런 배짱을 부릴 생각이었다. 전날 잠도 설치고 강원도 고개를 넘었는데, 첫날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하늘도 안 도와주는구나 싶었다.

투자하겠다는 곳이 전혀 없었나.

97년에 모 건설회사에서 제작비 4억원을 대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약조하고 1주일 뒤에 돈 받으러 갔는데 부도가 나서 사무실이 난장판이 돼 있더라.

찍다보면 돈 대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법도 한데.

60% 찍었을 때 2억원 정도면 마무리될 것 같아 돈을 구하러 다녔다. 그때 한 제작자가 나보고 일단 찍어놓은 걸로 대강 편집하고 이틀 짬 내서 보충 촬영하라고 하더라. 2천만원 줄 테니 후반작업하고. 나중에 3천만원 정도 들여서 홍보하고 극장 두어 군데 잡고. 하도 어이가 없어 자리를 뜨긴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래도 그 사람은 제 돈 몇천만원이라도 내주겠다는 사람 아닌가 싶더라. 그땐 정말 하늘이 노랬다.

배우들 설득하기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미망인 역은 가장 늦어졌다. 김예령씨는 촬영 이틀 전에 캐스팅했는데 만나서 그간의 어려움부터 풀어놨다. 그랬더니 울더라. 코까지 풀면서.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우는 게 쉽지 않은데, 어머니와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싶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술 먹으면서 예령씨가 그러더라. 나 보면서 자신의 남편(김예령씨와 함께 사는 이는 <중독>의 박영훈 감독이다. 당시 그는 데뷔하기 이전 감독 지망생이었다) 얼굴이 떠올라서 울었다고.

작품의 포커스가 달라지진 않았나.

처음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단순화하려 했다. 대신 끝까지 물고 늘어져보자고 생각했지. 어머니가 뭔가. 근원이고 본질이고 원초적인 그 무엇 아닌가. 나를 낳아준 사람이라는 것을 넘어서 진정하게 갈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어머니일 수 있겠다 싶었다. 구도하는 이에겐 진리이고, 배고픈 이에겐 빵이고, 한국 같은 나라에서 통일이고, 뭐 그런 식으로. 그런데 찍다보니 아무래도 흥행에 대한 고려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경수술 등의 에피소드를 넣었다. 대신 짜임새는 많이 흐트러졌다.

주지스님이 동승의 출생의 비밀을 토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직접적이다.

원작을 보면 그 장면이 전체 이야기의 반이다. 원래는 동승의 어머니를 포함해서 다른 캐릭터들이 함께 등장하는데, 영화에선 미망인만 남겨 3명으로 줄이고, 주지 스님의 대사로 상황을 처리하려다보니 그런 것 같다. 고백하건대 <동승>은 미완성이다. 그걸 두고 사전에 의도된 연출이라고 강변하고 싶진 않다. 사실 1억원 가지고도 좋은 영화 만드는 사람도 있지 않나. 난 7년 동안 7억원이나 썼는데….

마지막 장면은 감독으로서 본인의 심경을 그대로 도려내서 바른 것처럼 보인다.

표현물은 어떤 식으로든 자화상의 요소를 담게 마련이다. 영화 찍는 내내 거짓말 하지 말자, 모르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내가 정서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이야기만 하자고 했다. 똑똑한 관객 두고 거짓말했다간 다 들통날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내겐 관객이 부처다.

개봉이 코앞이다.

다음 영화 한편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역사 속 인물을 비틀어서 코미디영화 한편 찍어보고 싶은데. 뱃속에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한번 빚어보고 싶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