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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見男女, <나비>의 김정은+김민종

“옵빠아~” “봉자야!”

비 내리던 4월의 어느 오후, 김민종김정은이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영화 속에서 ‘애틋한 연인’으로 분했던 두 사람은 우산을 내던지고 빗속에서 뜨거운 포옹을 나눠도 시원찮을 판에, 나란히 앉아 가끔씩 눈을 맞추며 실실 웃기만 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 는 듯이. 그 품새가 꼭 죽이 잘 맞는 오누이나 단짝 친구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김민종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김정은을 배역(은지/혜미)의 초기 이름인 ‘봉자’라고 부르는 걸 듣노라면, 아무리 영화 속이라도 이들 사이에 비극적이고 강렬한 로맨스가 싹텄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역시 배우는 배우다. 이날 촬영의 컨셉은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조용히 절규하는 듯한, 연인의 간절하고 뜨거운 눈물. 촬영기자의 ‘울어달라’는 주문에 난감해하던 두 배우는 그러나, 구슬픈 배경음악을 슬쩍 흘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내 ‘감정이 업’되어, 손을 맞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엄뜨린다. 눈물을 닦아내고 메이크업을 손보는 일을 반복해야 했을 정도. 군부독재 시대의 폭력과 광기가 갈라놓은 <나비>의 슬픈 연인 민재와 은지의 재림으로, 스튜디오는 이내 숙연해지고 말았다.

김민종의 귀환 >> 지난해 늦가을, 김민종은 느닷없이 정태원 사장의 호출을 받았다. 괜찮은 시나리오가 있으니 읽어보고 출연 여부를 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24시간 이내에. 김민종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연이은 영화의 실패로 의기소침해진 그는 친지들로부터 “안 되는 일에 기운 빼지 말라”는 충고를 듣던 차였고, 영화와 연을 끊어버리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포장마차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김민종은 영화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자존심이죠. 시작을 영화로 했다는. 현장의 즐거움, 작품의 무게감, 그런 것도 포기하기 힘들었고.” 그리고 “영화계가 널 그만두게 할 것 같으냐”는 호기어린 격려에 힘입어, 스스로에게 한번의 기회, 23번째 영화 <나비>의 출연을 허하기로 했다.

“의리로 모든 게 이뤄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저도 이성을 찾아가고 있어요.” 그간 거쳐간 작품들 중 상당수가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한 기억은, 누구보다도 김민종 자신이 아프게 간직하고 있다. “지쳤다기보다는 나랑 영화랑, 나랑 관객이랑, 주파수가 안 맞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 같은 게 들었어요.” 김민종은 그간의 흥행 부진을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린다. 다만 출연을 결정할 때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제작사와 배급사 진용 등을 살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나비>는 그런 조건에 두루 부합하는, 최적의 작품이라고도 했다.

사랑 때문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마는 <나비>의 민재는 그간 김민종이 연기한 <삼인조> <개 같은 날의 오후> <토요일 오후 2시>의 어리숙한 삼류 인생들과 닮아 있다. “민재라는 옷은 민종 오빠밖에 못 입어요. 허풍기와 양아치 근성, 욱하는 성질도 있지만, 순수하고 인정 많고 착한, 그런 남자요. 코믹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핍박받는 삼류 인생 있잖아요.” 김정은이 증언하자 김민종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들 저한테 딱이라고 하는데, 그게 칭찬인지, 욕인지…. (웃음) 좋게 해석하자면, 배우를 인정한다는 거겠죠. 그래서 현장이 더 즐거웠어요.” 알고보니, 그 ‘즐거운 현장’의 핵심 멤버는 김민종이었다. 영화의 날씨에 고생하는 스탭들을 위해 직접 소주잔을 돌리고, 서울서 골뱅이 통조림을 공수해오는 정성을 보인 것. “그렇게 안 하면 제가 불편해요. 분위기를 풀 수 있는 사람이 배우니까, 제가 오버해야죠.”

청춘영화의 반항아 캐릭터로 충무로에 입성한 김민종은 그간 “액션기 있는 멜로” 또는 “멜로기 있는 액션”를 주종목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그 자신은 <기쁜 우리 젊은 날> 같은 ‘정통 멜로’에 대한 갈증을 숨기지 않는다. 외모와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숙제임을 인정하면서. 사람 좋고, 성실한 배우 김민종이 두고두고 그 숙제를 풀어가는 모습을 스크린에서 지켜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김정은의 배신 >> <나비>를 찍으면서, 김정은에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촬영이 끝나면 모니터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스탭에게 이렇게 묻고 또 물었던 것이다. “나, 웃겼어요? 안 웃기죠? 괜찮죠?” 물론 조바심과 걱정이 심했던 촬영 초반에 국한된 일이긴 했지만, ‘웃겨선 안 된다’는 강박과 ‘난 왜 이렇게 웃길까’ 하는 불만이 내내 그를 괴롭힌 모양이다. 그러니 <나비> 시사회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을 해봤으니, 이젠 여한이 없다”고 말한 것도 과장은 아니었다.

코미디의 스타, CF의 여왕 자리를 떡허니 차지하고 앉은 지 1년이 채 안 되는 시점. 김정은은 “아주 센 코미디를 하겠다”는 애초의 공언을 뒤집고, 액션멜로 <나비>를 택했다. 김정은의 역할은 사랑하던 남자를 찾아 무작정 상경했다가, 요정을 거쳐 군 실력자의 첩이 되고, 뒤늦게 재회한 옛 연인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면서, 또 한번의 생이별을 강요당하는 비련의 여인 은지. 순박한 산골 소녀에서,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은 곪아 있는 상류층 여성으로, 영화 안에서도 외모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 물론 ‘사랑밖엔 난 몰라’ 하는 캐릭터의 테마는 일관된다. “비련의 여주인공은 모든 여배우의 꿈일 거예요. 거기다 바보스러울 만큼 순수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 더욱 맘이 끌렸어요. 아무리 삼류 인생이지만 그들의 사랑까지 삼류로 치부될 순 없는 거잖아요.”

영화 초반에 강원도에서의 순수하고 행복했던 한때(다소 코믹하다)가 소개되는 대목은 김정은의 제안으로 끼워넣어진 것이다. 세련되고 화려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카리스마 있게’ 첫 등장하는 것이 애초 설정이었으나, ‘삼류’와 ‘카리스마’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그간의 이미지에서 무리한 ‘점프 컷’은 강행하지 말자는 판단으로, 부드러운 흡수막을 세워본 것이었다. “물론 ‘저 바뀌었어요’ 하고 보여드려야 하는 것들도 있죠.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사랑 이외의 것에는 절대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점이 현실의 저랑은 차이가 있지만, 가능한한 캐릭터에 저를 많이 대입해서 연기해보려 했어요.” 그런 탓인지 김정은은 크랭크업 이후 한동안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작품 끝나고 역할에서 빠져나오느라 애먹는다는 말, 별로 믿지도 않고 낯간지러워하던 김정은 본인이, 바로 그 상황에 걸려든 것이다. 민망하게도.

김정은은 ‘삐딱한’ 데가 있다. 본인도 그걸 인정한다. <가문의 영광>이 크게 히트한 다음에는, 아주 다른 장르와 분위기의 작품으로 ‘변신’을 시도할 거라는, 그래야 한다는 여론을 뒤집어보고자, ‘센 코미디’를 수소문하고 다녔다(결과적으로는 액션멜로를 먼저 하게 됐지만, <가문의 영광> 직후의 계획은 달랐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나비>에 출연한 것을 본격 멜로 배우 선언으로 받아들이자, 보란 듯이 또 다른 코미디 <불어라 봄바람>을 선택해 보였다. 예상을 벗어난 선택, 그 선택에 당당한 배우를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전 시작부터 센 걸 많이 해서, 편안해요. 제가 뭘 해도 놀라시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두렵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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