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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깃털처럼, 검은색 위의 다채로움, <런어웨이>의 레이첼 와이즈
김현정 2004-01-14

레이첼 와이즈는 고집이 무척 세다. 그녀는 원래 ‘바이스’(vice)라고 발음해야 하는 자신의 유대계 성(姓)을 “포르노 배우 같은 느낌이 나기는 한다”면서도, 끝끝내 바꾸지 않고 에이전트와 맞섰다. 한밤처럼 어두운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와이즈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맨손으로 유럽 대륙을 탈출한 부모의 핏줄 덕분인지, 흔들림이 없고 단호하다. “할리우드 대작에는 흥미가 없다. 가난한 독립영화가 나와 맞는다”던 단언 몇년 뒤 “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진 영화를 선택한다. 제작비가 얼마인지와는 상관없이”라고 바꿀 때조차도. 그리고 그런 고집,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또렷한 자세가 지금 레이첼 와이즈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받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리처드 기어와 <다윗왕>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버린 열다섯 버릇없는 소녀였다.

<미이라> <미이라2> <어바웃 어 보이> 덕분에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기억되지만, 와이즈는 한톤 가라앉은 색채의 외모와 어울리는 영화들로 처음 경력을 쌓았다. 스탕달의 걸작을 TV시리즈로 만든 <적과 흑>은 영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성공작. 이 시리즈에서 그녀는 제멋대로인 귀족 처녀 마틸드를 연기했고, 이완 맥그리거와 함께 연출한 누드로 낯선 유대계 이름을 깊이 새겨놓았다. 그 선택은 느닷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케임브리지대학 시절, 레즈비언 연인이 서로를 난폭하게 집어던지고 치고받는 희곡을 직접 쓰고 연출해 에든버러페스티벌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기 때문이었다. 길들일 수 없었고 때로는 남보다 예민하게 상처받기도 했던 어린 와이즈는 그처럼 연기를 통해 삶의 중심을 잡아나갔다. 항상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는 <런어웨이>의 말리는 그래서 와이즈를 위한 역이었다. 말리는 애인을 배심원으로 만들고 피고와 원고쪽에 각각 승소조건으로 1천만달러를 요구한다. 하지만 돈이 목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사랑을 놓칠지 모르는 위기를 견뎌가면서까지, 재판에 승부를 거는 걸까. 와이즈는 “말리는 영화 속에서 또 연기를 하는 인물이다. 나는 마스크 위에 마스크를 덧쓴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순수한, 연기에서 쾌락을 얻는 배우. 와이즈가 고전영화의 강인한 여배우 캐서린 헵번이나 베티 데이비스를 닮았다는 평가를 얻는 것은 저널의 아부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매년 두세편의 영화를 넘치도록 찍고 있는 와이즈는 지나 롤랜즈 같은 배우가 되기를 꿈꾼다. “존 카사베츠 같은 감독을 만나, 계속 함께하는 것이 내 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까마귀 깃털처럼, 검은색 위에서 다채로운 빛을 반사하는 배우다. 그녀가 한 감독 그늘 아래 머물기를 바라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코 맞지 않을 것 같은 벤 스틸러, 잭 블랙과 출연한 코미디 <엔비>, 지옥에서 돌아온 형사를 맞아들이는 <콘스탄틴>, 홀로 어린 딸을 키우는 사진작가를 연기한 <데이지 윈터스>가 앞으로 만날 수 있는 그녀의 영화들이다. <런어웨이>의 감독 게리 플레더는 “와이즈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여자들도 좋아할 만한 것이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놓치고 있는”이라고 그녀를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아름다움은 질시를 부르지만, 와이즈는 그저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다. 자신있게 말하는 것처럼 “명사도, 가십에 오르내릴 만한 누구도 아닌, 그냥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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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Gam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