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나 뭉크에 의해 널리 알려진 <죽음과 소녀>는 원래 독일의 서정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에게서 비롯되었다. 병상의 소녀를 ‘달콤한 죽음’으로 유혹하는 신의 대화를 다루는 내용의 시(詩)인 <죽음과 소녀>는 히로스에 료코의 최신작 <연애사진>에서 플래시백과 사진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그녀의 배역 시즈루를 떠올리게 한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연애사진> 속의 소녀 시즈루는 전작 <비밀>의 마나미와도 조우한다. 마나미라는 캐릭터도 ‘빙의’라는 특수한 현상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혹은 이어간다는 착점에서 히로스에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죽음’과 줄다리기하는 ‘소녀’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연애사진>의 초반부 마코토(마쓰다 류헤이)와 연애하던 시절의 시즈루가 그러하듯이, 영화 속 ‘죽음’의 줄다리기에서 내려선 현실의 ‘소녀’ 히로스에는 매우 발랄하고 적극적인 배우로 성장해왔다. 어린 시절부터 “TV에 나오고 싶어”라고 노래를 부르던 이 소녀를 일본의 문화 아이콘으로 점프시킨 결정적 계기는 1996년 NTT 도코모의 페이저(삐삐) 광고였다. TTL의 임은경이나 마이젯의 전지현이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광고는 이동통신이라는 기술적 흐름을 매개로 한 ‘소녀’를 디지털 시대의 요정으로 변모시키는 야심찬 시도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듬해 97년 국내 미개봉작인 로 일본영화제의 주요 신인상을 석권하며 영화배우로의 화려한 입문을 신고했으며 99년에는 <비밀>과 <철도원>을 동시에 선보이며 해외팬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선명하게 알리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에는 일본에서 전통적 드라마 명가로 인식되는 의 연작 <섬머스노우>(2000)와 <모토카레>(2003) 같은 러브스토리에서 긴키 키즈의 아이돌 슈퍼스타 도모토 쓰요시와 연속으로 호흡을 맞추며 브라운관에서도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한다.

<연애사진>의 시즈루도 변화한다. 마코토를 처음 만났던 시절의 당돌하고 귀엽기만 한 소녀에서 사진을 배운 뒤 미국으로 가서 자신의 세계를 가지려는 예술가로 성장하는 것이다. 히로스에도 아이돌 엔터테이너나 ‘소녀’라는, 오랫동안 자신을 고정해온 기존의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벗어나는 중이다. 2002년에 출연한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과 옴니버스영화 <잼 필름즈>는 그녀의 연기 변신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된다. 와타베 아쓰로와 열연한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에서 시력을 잃어버린 상속녀 역을 소화하며 “사랑 따윈 필요없어”라고 표독하게 내뱉는 차가움이나 이와이 순지가 연출한 <잼 필름즈>의 <아리타> 편에서 모놀로그를 읊조리며 그림을 그리는 담담한 모습은 그녀에게서 전작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변화의 조짐을 엿보게 했다. 히로스에에게 2003년은 한마디로 ‘질풍노도’의 한해였다. 10월에는 자기추천제로 입학한 와세다대 국어국문학과를 연예활동에 전념한다는 이유로 자퇴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MBC 드라마넷을 통해 방영되었고 <냉정과 열정 사이>의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함께 출연한 <후지TV>의 드라마 <속도위반 결혼>을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이라도 하듯이 12월 임신 사실을 먼저 밝히고 결혼발표를 하는 경험을 겪기도 했다. 상대는 나이키 모델 출신이자 디자이너인 오카자와 다카히로. 지난 4월 10일 남자아이를 출산함으로써 이미 어머니가 된 그녀는 영화 속에서 ‘소녀’이미지를 탈피하는 동시에 현실에서도 성인사회로 걸어가고 있다. 2005년의 NHK의 대하드라마와 가을드라마에 캐스팅되는 등 복귀 이후 스케줄이 이미 확정된 이 다재다능한 1980년생 여배우가 본격 ‘성인’배우로서 어떠한 기량과 색깔을 선보일지 예상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녀의 팬이라면 <연애사진>의 시즈루와 다시 한번 이와이 순지에 대한 그녀의 신뢰를 확인시킨 <하나와 아리스>의 카메오 출연을 바라보며 시간의 공백을 메우는 일도 즐거운 기다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