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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인 더 컷>의 멕 라이언
박혜명 2004-04-30

한 여인이 위험하게 흔들린다. 초점이 나가 흐릿한 화면 위로, 그녀는 음울하게 젖은 뉴욕의 거리 한복판을 혹은 밝은 대낮 햇볕에 메말라버린 골목을 누빈다. 그녀는 멕 라이언이다. 제인 캠피온의 신작 <인 더 컷>에서 멕 라이언은, 믿지 못하는 대상 앞에서 무언가 감추려는 듯 안경이나 선글라스를 끼고, 예의 그 발랄했던 짧은 머리를 어깨까지 곧게 뻗어내리는 단발로 바꾸고 등장한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위태롭게 걸어가는 그녀가, 우리는 낯설다. 그녀 역시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끄집어내어진 새로운 욕망에 익숙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그 모습은 금세라도 부러질 듯한 불안한 뾰족구두를 닮았지만, 멕 라이언은 꿋꿋하게 걸어간다. 그래서 더욱 낯설다.

이 스크린 속의 변화는, 딱 부러지게 2000년의 그녀의 삶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해에 멕 라이언은 6년간 운영해왔던 영화사 프루프록을 정리했고 데니스 퀘이드와의 9년간의 결혼을 청산했다. 그가 제작에 관해 탁월한 안목을 보여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영화사가 문을 닫았다는 건 그리 큰 이슈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혼은 달랐다. 사람들에게 멕 라이언과 이혼은 잘 연결지어지지 않는 대상이었다. 마약 중독자였던 남자를 재활원에 보내 회복시키고 그 와중에 어머니의 강한 반대도 무릅썼을 만큼 힘들게 결혼한 뒤, 남편과 아들 잭에 대한 애정을 공공연히 밝혀왔던 그였으니까. 불패신화의 ‘로맨틱코미디의 여왕’으로서 이 장르가 바탕에 깔고 있는 미국 중산층의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스크린 안팎으로 실현해 보였던 그였으니까. 완벽한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남성과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여주인공으로서. 그리고 얼마 뒤 그는 타국 땅 런던에서 진정한 자기 해방(self-liberation)의 순간을 맞았다. 러셀 크로와의 염문설로 세상의 온갖 타블로이드 커버가 들썩이던 때였다. “원 올드위치 호텔에서였다. 로비를 걸어들어가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날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그 반응에 무너지지 않고 계속 걸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안에서 그냥 웃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언제나 가장 무서워하는 것, 대중의 비난과 불만 같은 것들은 내가 내 자신을 잘 알고 있을 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인 더 컷>의 프래니는 본래 니콜 키드먼에게 예정된 역할이었다. 그러나 니콜 키드먼이 중도 포기를 선언했고, 이 역할을 간절히 원했던 멕 라이언은 기꺼이 오디션을 치렀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해방감을 충만히 경험했으니 더이상 두려울 것 없는 도전이었다. 결과? 아름답다. 영화 속에서 프래니를 사랑하게 된 말로이 형사(마크 러팔로)는 연인의 눈을 바로 보며 고백한다.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이는 멕 라이언을 바라보는 우리의 고백도 된다. 그는 정말 아름답다. 잘 망가지지 않는 플라스틱 마론인형의 느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연약하지만 생동감 있는 욕망과 육체로 <인 더 컷>의 멕 라이언은 우리를 낯설게 매혹한다. “그전까지는 난 제인 캠피온을 위해 준비돼 있지 않았었다. 5년 전이었다면 이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예술가이지만 절대 타협하지 않는 사람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지금 나의 영웅이다. 난 그녀를 동경하고 사랑한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등 꽤 오랫동안 노라 에프런의 줄기에서 꽃을 피웠던 멕 라이언은 이제 아이처럼 토라지지도, 무모하게 투정하지도 않는다. 할리우드의 생존전략을 영리하게 이해하며 자기 커리어를 관리해온 니콜 키드먼이 했다면 적절히 어울렸을 법한 역할. 이것을 불패의 로맨틱코미디 여왕은 실제 삶에서 맞이한 변화와 제인 캠피온이라는 또 다른 줄기에서 흡수한 영양분으로 기존 이미지를 단번에 꺾으면서 소화해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강인해진 이 여성을 함부로 보지 말라. “당연히 나에게 주어질 법한 원형 같은 역할이 있었다. 그것을 배신했을 땐 뒤따르는 결과가 있는데, 여기서 나는 완벽하고 멋진 자유를 얻었다. 정말 신경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엇을 써대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엇을 말하고 다니든, 난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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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GAM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