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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천 가지 얼굴을 모은다, <한 도시 이야기>의 이재용 감독

10년 전 미완의 프로젝트로 끝났던 다큐멘터리 <한 도시 이야기>가 다시 만들어진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재용 감독이 <정사>로 데뷔하기 전인 1994년 6월9일, 700여명의 인원이 동원돼 서울의 하루를 기록했고 편집 단계에서 중단됐다. 당시 한 대형 호텔의 방만 400여개를 잡아 6월9일을 함께 맞이한 이들은 35mm, 16mm, U-matic, 베타캠, 홈비디오, 스틸 카메라 등 서울의 하루를 기록할 수 있는 모든 매체를 들고 동시에 나섰다. 이날 하루 35mm 필름 12만자를 썼고, 7만컷 정도의 사진을 찍었으며, 300여명을 인터뷰했다. 그때 제작된 팸플릿의 크레딧에는 감독 이재용, 촬영감독 김형구, 아트디렉터 최정화·오형근, 라인 프로듀서 표성윤, 실무 프로듀서 전양준, 제작 신씨네 등이 올라 있다. 10년이 흐른 지금, 이재용 감독을 중심으로 당시 주축이었던 오형근(사진작가), 최정화(미술가)를 비롯해 안은미(현대무용가), 백지숙(문화평론가·마로니에 미술관 큐레이터), 김선정(프리랜서 큐레이터, 전 아트선재센터 부관장), 프로듀서 이진숙(<뽀삐> <여섯개의 시선>), 프로듀서 김영(<장화, 홍련>) 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도시 이야기>는 1994년에 출발하여 2004년, 그뒤 2014년 등 10년째 되는 해마다 새로운 매체, 새로운 컨셉과 형식으로 진보하는 프로젝트, 혹은 페스티벌로 계승될 것”이라는 뜻을 모아서.

이재용 감독이 10년 전에 스스로에게 묻고 답했던 글의 한 대목이 <한 도시 이야기>의 취지를 잘 설명해준다. “서울에 1천만명이 살고 있다면 서울에는 서울이 1천만개 있는 것이다. 그 관점들을 모으면 하나의 서울이 모자이크되어 드러날 것이다. … 비록 하루를 기록하지만 이것은 우리 삶의 소중한 기록이며, 가치있는 기록은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본다. … 그날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나의 역할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주어 누구나 예술가가 되게 하는 것이다.”

-10년 전에 편집을 하다가 멈췄던 이유는.

=예산 때문이다. 운영을 잘못했는지 어쨌는지 모든 예산이 행사를 여는 시점에 다 소진됐고, 후반작업을 할 예산이 남아 있질 않았다. 이후에 어떻게든 해보려고 삼성영상사업단, 외국의 영화제 등등 사방으로 뛰어다녔는데 잘 안 됐다. 프로듀서가 아닌 감독 마인드였던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약간의 과장과 확신을 줘야 하는데 너무 모든 과정을, 고민하는 것까지 솔직히 보여주니까 돈을 끌어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1년을 허비하다보니 젊은 날 너무 안타깝게 보내는 것 같고(웃음), 그래서 신씨네의 신철 대표와 일단 묻어두자, 언젠가 여력이 생기면 하자고 한 게 10년이 됐다. ‘다음 세기에나 완성이 될까’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10년 전 앨범을 들여다봐도 재밌는데, 그때 찍었던 것 중에 사라진 게 많다. 청계천 고가, 총독부, 월드컵경기장 자리의 난지도, 판자촌들, 지하철 공사 현장, 인터뷰 등을 보면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계속 해야겠다는 의욕이 솟는다. 10년의 시간이 그런 생각을 성숙시킨 것 같다.

-10년 만에 다시 시작한 계기는.

=지난해 12월 춘사영화제에서 만난 김홍준 감독이 ‘내년으로 10년이 되는데 그냥 넘어갈 거냐’고 말을 건네오면서 시작됐다. 10년 전 그날 김홍준 감독은 <장미빛인생> 쫑파티 때 들이닥친 <한 도시 이야기>의 카메라에 자신이 찍혔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매년 그날이 오면 가슴이 아팠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까 싶다’고 했더니, 김 감독이 ‘아이디어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도 했다. 일본에서 소극장을 돌며 상영하던 프로그램이 작품 수급에 문제가 생겨 일주일간 펑크가 나게 되자 극장장 겸 감독이던 구로사와 기요시와 그의 친구들 6명이 2∼3일 안에 15분짜리로 자유롭게 찍어 한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주제를 경찰로 정한 이 ‘캅 프로젝트’는 성황리에 상영을 마쳤고 이후 각종 영화제에서 대접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재밌는 사례를 많이 들려줬는데, 여기에 고무돼 주변에 말을 꺼내봤더니 10년 전에 했던 이들 중에는 ‘어휴, 그걸 또 해’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재밌겠다는 반응이 많아 용기를 냈다.

-이번 작업을 속편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닌데 일단 <한 도시 이야기 9404>라고 이름 붙였다. 1994년부터 2004년으로 이어진다는 뜻으로. 그리고 10년 뒤에 또 하게 되면 <한 도시 이야기 9414>로 부르고.

-10년 전에 찍어놓은 자료 어디에 있나.

=10년 동안 내가 모두 끌어안고 살았다. 9년간 대전 유성의 집에서 있었고, 1년 전에 서울 집으로 옮겨왔다.

-그때의 자료들도 이번 프로젝트에 활용되나.

=그건 전시회를 통해 보여진다. 5월25일부터 6월7일까지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한 도시 이야기’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 단계에서 그만두려고 한 적이 있다. 얼마 전 미국에 머물던 신철 대표를 만나 이번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판권문제도 있고 해서. 대화를 나누다보니 10년 전 상황이 떠오르면서 이게 너무 복잡하고 힘든 작업이라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하고 다녀야 하는데 그럴 시간에 장편 하나를 더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포기해야겠다고 맘먹고 돌아왔다. 그런데 미국 가기 전에 큐레이터인 백지숙씨와 김선정씨에게 어쩌면 이런 거 할지 모르겠다고 말을 꺼내놓고 갔는데, 그들이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자는 거다. 안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미술쪽에서는 이게 너무 신선하고 재밌다며 그냥 넘기지 말자고 하더라. 그 당시의 영화필름, 사진, 오브제 등을 활용해 10년 전의 서울을 다시 본다는 컨셉이 좋다는 거다. 공교롭게도 전시회 공간이 5월25일부터 6월7일까지 비어 있는데 6월9일을 앞두고 있어서 우연이지만 마치 필연처럼 다가왔다.

-오브제는 어떤 게 있나.

=당시 이 행사 이야기를 접한 학교에서 사생대회 같은 걸 해서 보내준 그림들도 있고, 참여자들이 조그만 수첩에 초상권 허락서 등을 기록해둔 것도 있고, 맞춰서 입은 모자와 옷 등이 있는데 지금 보면 재밌다. 그때 만든 자료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되는 것 같다. 아트디렉터 최정화, 박광수 감독, 영화평론가 정성일, 건축가 함성호씨 등 다양한 문화계 인사가 참여해 만든 두터운 팸플릿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기도 하다. 비디오아트는 물론이고 1만장 정도의 사진을 슬라이드로 계속 보여준다. 동시에 이 전시 공간은 이번 작업에 참여할 일반인들의 접수 창구가 될 것이며 특히 작업 자체가 전시가 되도록 할 생각이다. 스탭들이 컴퓨터 등 사무기기를 놓고 일을 진행하는 그 자체도 전시의 내용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모든 걸 와서 보고 어떤 동기와 영감을 받으면 그곳에서 바로 신청을 하도록 한다는 거다. 나는 그곳에 상주하면서 약간의 설명회도 열 것이고. 전시회 설계는 최정화씨가 한다. 그래서 6월9일은 전시회의 피날레이면서 프로젝트의 시작인 셈이다.

-예전에는 제작사로 신씨네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작 주체가 어떻게 되나.

=사실 이 프로젝트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 공공적 성격이 더 짙다. 당시에는 장편영화 데뷔 전의 출발인 셈이어서 극장에서 상영되는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만들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신씨네를 중심으로 제작을 했던 거다. 다시 정리할 필요는 있지만 이번에는 공공 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싶다. 판권을 갖고 있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도 정말 하고 싶다면 하라면서 자신도 약간의 지원을 하겠다고 흔쾌히 허락해줬다. 영리를 먼저 염두에 뒀을 때 오게 되는 부담감이 이 프로젝트의 자유로운 정신을 위배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 일종의 인디 작품인 셈이다.

-이재용 감독은 총감독이 되는 건가.

=영화적으로만 보면 그런 셈인데, 결국 기획자가 되는 거 아닌가. 이번에는 개개인을 너무 혹사시키고 싶지 않아서 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진행하고 싶다. 현재로선 김홍준 감독, 두분의 큐레이터, 이진숙 프로듀서, 김영 프로듀서, 전양준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신철 대표 등이 위원이 되지 않을까.

-어떤 영화인들이 참여하나.

=10년 동안 알고 지내온 영화인들과의 관계를, 나의 인간성을 시험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이제 말을 꺼내고 있는데 하루 정도면 괜찮겠다는 반응들이다. 이현승 감독과 김성수 감독은 하기로 했고, 박찬욱 감독은 반쯤, 허진호 감독은 해야 한다고 했고, 김지운 감독은 하지 않을까 싶고. 나와 같이했던 배우들도 재밌다며 뭐라도 참여할 것 같다. 배우 배용준, 이정재 등. 부산영화제의 김동호 위원장도 카메라로 찍는 거 좋아하니까 참여하지 않을까.

-영화 바깥에서는.

=사진쪽에 얘기가 된 분들이 오형근, 구본창, 김중만, 조세현, 배병우, 조선희, 안성진씨 등이 있다. 영화 포스터로도 유명한 오형근씨의 경우, 자신과 사진을 찍었던 배우들이 대부분 참여할 것 같다고 한다.

-제작 방식에서 10년 전과의 차이점은.

=당시에 디지털은 우리가 실제로 쓸 수 있는 미디어 도구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모든 영상 기록을 디지털로 하기로 했다. 사진을 아날로그로 찍어도 기록·저장은 디지털 소스로 하는 거다.

-주제나 참여의 폭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때는 명분과 결과를 중시했고, 내가 통합을 해서 하나의 영화로 만들려 해서 35mm 같은 경우는 서울을 크게 정의할 수 있는 어떤 것들, 예컨대 돈, 사람, 쓰레기, 음식 등의 주제를 가지고 나눠 찍었고, 16mm는 특유의 기동성으로 35mm를 보조하면서도 자기 나름의 완결성을 갖도록 했다. 베타캠은 10개 팀으로 나눠 주로 인터뷰를 해 300여명의 다양한 생각들을 모았다. 사진쪽도 약간의 가이드를 주긴 했다. 예컨대 간판만 찍어달라거나 서울의 동물들만 찍어달라거나 해서 서울을 그물망처럼 빠짐없이 담아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조직이나 운영방식도 그렇고 자율적으로 가기 위해 많이 흩어놓으려고 한다. 주제도 자유롭게 할 거고. 다만 전시회를 통해 어떤 영감이나 자극을 받도록 할 필요는 있다. 그때 어디어디를 찍었고 누구를 찍었는지를 보면 ‘아∼ 저런 거를 찍을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의 가이드 말이다. 인터뷰만은 지원자들을 모아 방향을 정해서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다. 10년 전에 인터뷰했던 이들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을 비교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

-최종 결과물을 편집 등을 통해 하나의 작품으로도 만드나.

=당시 영화는 내가 편집을 하되 사진은 사진대로 독립적으로 가는 등 멀티한 예술을 하려고 했다. 이번에는 자기 완결성을 갖는 짧은 분량의 영상물과 사진을 제출하길 바란다. 이를 인터넷과 영화제 상영을 통해 중간 보고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 다음 결과는 지금 예측하기 곤란한데 그중에 선별해서 어딘가에서 공개를 할 수도 있을 거다. 별도의 한 작품을 만들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누군가 재편집하고 싶다고 나설 수도 있고. 아무튼 돈을 받고 보여주는 영리적 활용은 안 한다.

-자발적으로 한 작품을 만들어오는 거면 그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겠다.

=그렇다. 불친절한 프로젝트이긴 하다. 모든 예술은 영감에서 출발하는데 누구나 우리의 생각에 공감한다면 그날만큼은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수많은 나날 중 점 같은 하루에 예술적 작업을 할 수 있는 영감을 주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런 의의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문제는 있다. 사진은 찍어서 보내면 되는데 영화는 하루에 찍더라도 편집을 해야 하고 음악을 입히는 등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완성하고 싶으나 여건이 안 되는 이들에게는 편집 등 후반작업을 약간 지원해줄 생각도 있다.

-예상 참가 인원은.

=예상 못하겠다. 쉬운 듯하면서 부담스럽기도 한 것 같아서. 예술 작업이 심각하고 결과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즐겁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경험했으면 한다. 100명에서 1천명 사이?

-적어도 6월 말까지 다른 일은 못할 것 같은데 장편 구상은.

=영감이란 게 문득문득 나는 것이긴 한데 앉아서 집중해서 쓸 수는 없는 형편이다. 못 말리는 비구니라고 해야 하나 비구니가 주인공인, 그러나 너무 종교적이지 않은 작품을 구상 중이다. 올해 안에 시나리오를 쓰고 내년 상반기에 촬영에 들어간다는 생각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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