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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 평가는 싫다, <효자동 이발사>의 배우 문소리

조연이지만 <효자동 이발사>에서 문소리의 존재는 맑게 빛난다. 화면 중심에서 비껴 있지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안겨주는 연기는 그가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음을 알린다. 그런데 문소리는 차기작 <사과>의 출연을 앞두고 예상 밖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단순히 연기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자배우로서 이제껏 가지 않았던 길을 가고 있는 형편과 맞물려 있다. 4·15 총선 때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간판 선수처럼 떠올랐던 것에도 말 못할 속앓이를 했다. 그가 “난 자유로운 배우가 되고 싶은데”라고 주저주저하면서도 그동안 쌓아왔던 속내를 용기있게 보여줬다. 문소리가 배우로서 간절히 원하는 영역의 확장은 한국영화의 경계를 넓히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효자동 이발사>에서 문소리가 또 한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고맙다. 솔직히 말하면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고민이 많았다. <바람난 가족>이나 <오아시스>는 초반에 그 캐릭터로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지 페이스에 오르고 나면 괜찮았다. 캐릭터의 내적 의지가 굉장히 중요한 영화여서 그 엔진이 가동되면 톱니바퀴 물려 돌아가듯 끝까지 갔으니까. <효자동 이발사>는 내가 언제 들어가 이 톱니에 끼어야 하는지가 너무 어려웠다. 송강호, 감독, 영화는 맞물려 돌아가는데 어디서 발맞춰 들어가야 하는지, 내가 캐릭터를 잘 살려내고 있는 건지, 이 캐릭터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건지 계속 고민하면서. 청와대 뒷길을 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송강호 선배가 애 업고 가는 데 면박주고 그런다. 감독이 구시렁구시렁하면서 가라는데 정말 구시렁구시렁할 수는 없지 않나, 어떤 대사든 해야지. 이런 컷 하나하나에 생사가 달린 것이었다.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오버할 수는 없고. 그러면 영화가 삐그덕거리게 되니까. 이야기에 활력을 주는 조연이 돼야 하는데 처음이니까. 예전에는 카메라가 나에게 들어오거나 나와 동등했는데. 어떻게든 그 안에서 자리잡아보려고 애썼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하는 역할 이외에 또 다른 활력이 됐다고 하니까 다행이다.

<바람난 가족>은 굉장히 정치적 영화였고 문소리는 정치적 발언을 우회적으로 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바람난 가족>은 시대와 사건을 정면으로 가져오는 작품이 아니었다. 반면 <박하사탕>과 <효자동 이발사>는 정면으로 시대와 사건을 이야기하지만 여자는 개인적 비애를 보여주는 조연에 불과하고 남자들이 앞서서 이야기한다. 어떤 느낌인지.

이렇게 철저하게 남성의 역사였나 하는 생각이 들지. 정치라는 게 곧 역사가 돼버렸는데 그 정치가 남성의 정치였고. 여성이 그 이야기에서 끼어들고 그려낼 여지가 없다. 사실 이 영화가 격동의 역사나 정치적 사건을 뒤에 우스꽝스럽게 세워둔 알록달록한 세트 같은 거라고 생각했고 그 앞에서 펼쳐지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서민의 삶, 애환이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니 감독님이 의도했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으나 소시민의 삶보다는 권력과 아버지 성한모의 관계가 좀더 전면에 나왔다.

<씨네21> 창간호 특집이었던 ‘한국영화 파워50’과 관련해 통화했을 때 중간점검이 절실하다고 했다. 왜, 어떤 종류의 점검이 필요한 건가.

처음부터 내가 한국 영화계에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냐가 중요했고, 그것이 어려운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걸 넓혀보려고 노력 중이다. <바람난 가족> <효자동 이발사> 모두 다양한 역할을 해보려는 시도다. 촬영 준비 중인 <사과>를 하면서 한국 영화계에서 내가 어떤 필요의 배우인지 다시 질문해보고, 연기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캐릭터에 따라, 작품에 따라 다르지만 가진 것 없이 오래 왔다고 생각한다. 여러 면에서 나를 더 키울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과>라는 작품 자체가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캐릭터가 독특한 것도 아니어서 나 자신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이면서도 보편적 연기가 요구된다. 그런 연기, 그런 드라마, 그런 캐릭터에서 뭔가 중요한 걸 담아내려면 다시 기본이 중요한 것이고 달리 기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라는 느낌이 안 드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담이라는 건가.

그렇다. <오아시스>는 장애인이라는 요소가 있고, <바람난 가족>는 영화적으로 얼마나 센가. <효자동 이발사>에는 송강호 선배가 있고 스케일도 있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왔을 뿐이다. 그런데 <사과>는 본전 갖고 시작한다는 느낌이다.

<오아시스>가 상대적으로 감독의 영화라는 색깔이 강했다면 <바람난 가족>에선 비로소 배우 문소리의 개성과 매력이 돋보였고 지금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뿌리가 뽑히지 않은 나무가 되겠다는 건 아니지만 있는 동안은 튼튼하고 건강하게 서 있고 싶다. 그런데 작은 흔들림에 상처받지 않고 제대로 발딛고 서 있는 건가 하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사과>라는 작품이 그 분기점이 될 것 같다. 20대에서 30대가 되는 여자의 마지막 성장기를 다룬다. 가족, 직장, 사랑에 대해. 정말 사랑하는 게 뭔지 파고드는 데 30대로 접어드는 내 고민과 겹쳐진다.

개인 문소리가 드러나는 게 부담스럽다는 말인지.

배우가 자기를 드러내는 직업이지만 사실 자기가 아닌 탤런트를 하는 거다. 자기를 드러내는 연기가 있고, 감추는 연기가 있어서 작품에 유용한 만큼만 하는 건데 성격상 나의 어떤 면이 드러나는 걸 안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젊은 여배우가 <효자동 이발사>처럼 파마 머리에 생활력 강한 어머니로 나타나는 것 중 어느 게 더 부담스러운가.

전자가 훨씬 크다. 아줌마든 할머니든 작품 안에 내가 녹아들어가 있으면 상관없다.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나를 이해해줄 테니까.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어떤 종류의 영역을 뜻하나.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유용하게 쓰였으면 좋겠다는 거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각인된 면이 있었는데, <바람난 가족>과 <효자동 이발사>에서 또 다른 걸 했다. 장르적으로 넓어졌고, 대중도 이제야 좀 알아본다. 많이는 아니고.

4·15 총선에서 영화인들이 민주노동당을 대대적으로 지지했는데 대표선수처럼 언급된 이가 문소리였다. 부담감을 느꼈다고.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부담을 느낀 건 아니다. 선생님을 했든 가정주부를 했든 다른 뭘 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목소리를 소신껏 내고 싶다. 다만 배우라는 이름으로 과장되고 과다하게 받아들여지는 게 싫었다.

혹시 문성근, 명계남씨가 정치쪽에 발을 내딛을수록 연기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부담감을 느낀 건 아닌가.

그런 것도 있는데 사실 그분들은 십자가를 진 거나 마찬가지다. 난 그런 위치도 아니고 그런 의도도 아니다. 난 소신껏 목소리를 냈을 뿐이고 그분들은 희생과 의무가 있었다고 본다. 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분들을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처럼 보는 사회적 시선이 있는데 나에 대해서도 민노당을 지지한다든지 등의 사안에서 영화인 문소리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정당인이나 정치에 뜻을 둔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게 문제다. 오해의 여지가 없는데 사회적 흐름이 오해하기 쉽게 만든다. 내가 실제로 하고 있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당비 내고 지지한다고 말할 뿐이다. 배우라는 이유로 과다하게 부풀려지는 게, 사실이 아니니까 양심에 찔리기도 하고. 영화인으로, 직업인으로 나 자신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어떤 사회활동이나 봉사활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인이라는 게 내 정체성의 50% 이상을 차지하는데 자칫 어떤 영향을 받을까봐 우려했다. 이번 총선에선 라디오 CM 하나 했고, 당비 낸 것밖에 없다. 영화인 지지선언하는 데 가지도 않았다. 라디오를 한 것도 민노당이 원내 진입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작은 걸 한다고 한 것이다. 신문광고 등 다른 것도 있었으나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거라서 하지 않았다. <효자동 이발사>가 개봉하는 데 이미지가 연결될 수도 있어서 진솔한 목소리만 들려주자는 뜻에서 라디오만 했다.

어쨌든 지금 문소리는 뭔가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왜 내 인생은 계속 그래야 할까.

어떤 배우여야 하는가의 문제에서의 개척일 텐데, 이현승 감독이 문소리를 가리켜 “한국의 제인 폰다가 나타났다”고 했다. 말하자면 지적이고 똑똑하며 자기 주관이 뚜렷해서 정치적 발언도 당당히 할 수 있는 배우가 나타났다는 환영일 수 있는데, 대중 전체가 바라지 않더라도 일부 영화인들과 일부 대중이 이런 배우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끌려가지 말자고 생각한다. 내가 맞춰가면 끝내는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 걸어간 걸음이 아닐 때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런 요구가 있다는 건 안다.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고. 나쁜 요구는 아니지만 자꾸 역할이 주어지다보면 그 역할에 맞춰서 가게 되지 않나. 그러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한다. 사실 한국에 역할모델이 없기 때문에 가다보면 더 상처받고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두려운 건 아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지금 내가 한국에서 배우를 하고 있는 것만 해도 예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앞으로 10년 뒤의 행보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내 가치관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앞으로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겨레>에서 시평 원고를 청탁했는데 사양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겨레>의 정치적 주장은 분명하나 정당지는 아니고 신문사가 명망과 식견을 가진 이를 선별해서 청탁하는 칼럼이라는 점에서 배우의 이미지를 위해서 해볼 법도 했을 텐데.

10년 뒤면 모를까 지금은 힘들다. 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한다. 나에게 글쓰는 건 아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가능하다. 편지 한장 쓰더라도 밤새 쓴다. 얼마 전 최형인 선생님(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극단 한양레퍼토리 대표)에게 연기를 배우고 싶어서 밤새 편지를 썼다. 이건 이렇게 오해하지 않을까 저건 저렇게 오해하지 않을까 하며. 밤새 쓰고나서 아침에 보니까 너무 창피하고 부질없어 보여서 버렸다. 다음에 뵐 기회있으면 부탁해야지 하고. 시나리오 받고 거절하는 편지도 몇자 안 되는 걸 밤새 쓴다. 그런데 신문 칼럼은 얼마나 힘들겠나. 세상에 대한 눈이 넓어지고 분별력이 더 좋아졌을 때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몇몇 프로듀서와 감독에게 물어봤다. 배우 문소리에게 대중성을 좀더 넓히는 길과 정치적인 것이든 뭐든 자기 발언을 확실히 하면서 이제껏 한국에 없었던 여자배우의 길을 가는 것 중 어느 게 좋겠냐고. 반으로 갈리더라.

나를 아끼는 사람도 반으로 갈린다.

어느 쪽이 성공할지, 더 확률이 높을지는 그들 전문가도 모르더라. 결국 문소리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데.

영화를 한다는 건 대중에게 말을 걸고 내 맘을 보여주는 거다. 그건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내가 사회적 발언을 많이 한 건 아니지 않나. 최대한 아껴왔고 조금씩 늘려가려고 한다. 내 입지가 확고해지고 영향력이 커질수록 신중해야겠지만 더 늘려가려고 한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셈이네.

뭐, 음~. 신문 사회면에, 뉴스에 자꾸 나오고 그러면 관객이 별로 안 좋아한다고들 한다. 영화보는 데 방해가 되는 데까지는 안 하려고 최대한 노력할 거다. 그런데 지금 이것도 최대한 자제하는 건데 더 줄이라고 하면 입다물고 아무 생각 하지 말라는 건데 그건 너무하는 것 아니냐. 아무리 배우라고는 해도. 언론에서 과장해서 그렇지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한국영화가 발전하고 이 사회가 진보하는 만큼 관객도 달라질 거고 거기에 발맞춰가겠다. 아~, 이런 얘기 너무 많이 한다. 어디서 한 적 없는데.

한국 영화계가 연기력이 뛰어나면 다른 요소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지점에 도달했다고 보나.

아직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느끼기에는.

설경구, 송강호와 연기를 해봤는데 성차가 다른 배우로서 느낀 게 있나.

내가 체감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게 남자배우들은 연기말고 다른 덕목도 많이 평가받지 않나. 인간적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여배우는 연기 좀 잘한다, 예쁘다 말고 평가하는 기준이 없다. 이런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게, 나를 주변의 여배우들과 차별화하면서, 사실 큰 차이도 없는 것 같은데, 나를 상품화하는 전략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작품마다 열심히 했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자꾸 기존 여배우와 차별화하면서 이미지를 만드는 게 두렵고 싫다. 그런 차별화가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닮아가려 한다. 전도연 선배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도, 이미숙 선배가 그 나이에 중년의 섹슈얼을 뽐내는 것도.

요즘 몇몇 CF 등장하고 있는데 많이 가린다고 들었다.

어렵더라.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 건데. 깊이 생각하면 광고하고 싶지 않은 기업이 있을 수도 있고 또는 사회적 영향이 나쁘다고 생각되는 제품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주위에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몇달 동안 잠깐 하면 되는 건데 그게 뭐 중요하냐고 하지만 고민되는 게 사실이다. 이러니 사는 게 피곤하지. 그 상품이 나를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 상품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광고를 이용해 얻는 대중성도 있으니까. 일단 지금 이용할 수 있다면 해보자는 생각이다. 일단 서로 잘 이용한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이 공익근무 끝내고 같이 하자고 하면.

좋다. 그런데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웃음)

같이 하고 싶은 다른 감독은.

여성감독과 해보고 싶다. 남자주인공과 남자감독이 작업하면서 갖는 관계와, 여자배우와 남자감독이 소통하고 교류하는 방식은 다르다. 특히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감독에게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분신이고, 여자는 판타지이거나 자신을 억압하는 바깥의 존재다. 여자감독이 시나리오 쓴 작품에 출연하면 감독의 내부에 있는 것과 소통하면서 또 다른 내용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해보고 싶은 사람 많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를 보고 아주 새로웠다. 그런데 모호하다. 또 어떤 영화를 할지. 새롭고 도전정신이 있는 영화를 할 것 같아서 함께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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